핸드폰의 알람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에 마유즈미는 억지로 눈을 뜬다. 일어나기 힘든 몸을 겨우 일으키고 마유즈미는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껐다. 시간을 확인하면 새벽 4시다. 아직 시간은 남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유즈미는 비척비척 화장실로 걸어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는다. 그걸로도 정신이 온전히 들지 않아 냉장고에 있는 물을 꺼내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렇게까지 하면 정신은 어느 정도 깨지만 졸음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길게 하품을 하고 마유즈미는 노트북 앞에 앉는다.
턱을 괴고 즐겨찾기에 저장되어있는 NBA 중계 사이트를 찾아 들어갔다. 아직 경기 시작의 예정까지는 10분이 남았다. 그 녀석은, ―아카시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중계사이트는 선수들이 대기하는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지금쯤 시합을 앞두고 선수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겠지. 고등학생 때의 아카시는 시합 전에 어떻게 하고 있었더라. 마유즈미가 라쿠잔에서 아카시와 같이 농구를 한 건 벌써 몇 년도 더 된 이야기다. 하지만 아카시와 함께 농구 경기를 했던 건 딱 그 1년뿐이다. 그때와는 상황도 위치도 다르다. 그렇다 해도 마유즈미한테는 그때의 아카시가 다였다. 떠올릴 수 있는 건 그때의 아카시 뿐이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하면, 역시 안 되겠지. 마유즈미는 스마트폰을 잠시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파는 닿는다. 국제전화 자체는 기술적으로 문제없지만 시합 직전 전화를 하는 건 제법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아카시는 지금 시합 전에 집중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걸 깨고 싶지 않았다.
결국 전화를 걸지 않은 채 10분이 지난다. 선수들이 입장하고 경기가 시작된다. 아카시는 노란색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은 몇 번이고 봤지만, 아직도 마유즈미는 익숙하지 않았다. 마유즈미의 기억 속에 있는 아카시는 언제까지고 라쿠잔의 유니폼을 입은 그 모습이었다.
시합의 전개는 빠르게 진행된다. 마유즈미는 눈으로 열심히 시합 전개를 쫓는다. 쟁쟁한 선수들이 가득한 NBA의 선수들 사이에서도 아카시의 존재는 꽤 눈에 띄었다. 고등학교의 농구코트에서도 그랬지만 아카시는 농구 선수로서는 결코 큰 키가 아니다. 거기에 서양인 사이에서 동양인인 아카시의 존재는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경기를 압도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카시 세이쥬로였다. 그 광경은 마유즈미에게 있어서는 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아카시가 덩크로 골을 넣을 때, 마유즈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다.
집중하고 보고 있으면 어느새 시합은 끝나있었다. 결과는 아카시가 속한 팀의 승리다. 시합의 MVP를 뽑자면 단연코 아카시였다. 곧 선수들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아카시의 인터뷰가 나온다. 마유즈미는 저도 모르게 노트북의 모니터로 손을 뻗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딱딱한 감촉일 뿐이다. 화면 너머의 아카시는 멀게만 느껴진다. 그건 물리적인 거리 때문만은 아닐 터다. 아카시와 농구가 하고 싶어졌다.
최근 마유즈미는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다. 마유즈미와 살고 있는 것도 햇수로 몇 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드물었다. 지금도 마유즈미는 책을 펼쳐놓은 채 멀거니 책 페이지만을 보고 있었다. 책을 넘기는 손은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 저건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겠지.
"열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어……?"
지켜보던 아카시가 보다못해 불쑥 한마디를 꺼내면 마유즈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마유즈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마유즈미의 이마에 아카시가 자신의 손을 올린다. 미열이긴 하지만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도가 뜨겁다.
"미열이긴 하지만 열이 있긴 한 거 같네요."
"그러고 보니 요새 몸이 꽤 나른했던 거 같기도 하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됐어, 이 정도는 쉬면 나아."
아카시가 걱정스레 제안하면 마유즈미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카시의 눈이 못마땅한 듯이 가늘어진다.
"병원은 제때 가는 게 좋아요."
"정말 괜찮다니깐, 이 정도는."
"아무리 그래도 가보시는 게 좋아요. 작은 병이라고 방심했다가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저희 어머니도 처음에는 작은 병이었는데……."
"……."
어머니의 얘기를 꺼내면 아카시는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 모습을 보는 마유즈미는 곤란해진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갈 수도 없었다. 포기한 듯 마유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그래도 지금은 밤이니깐… 내일도 몸이 나른하고 열이 있다 싶으면 갈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병원부터 가보죠. 저도 내일은 휴가 낼 테니까."
"벌써? 나 아직 이 책 다 못 읽었는데."
"쉬는 게 먼저예요."
아카시는 단호하다. 시계를 보면 시침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밤이긴 하지만 잠들기도 이른 시간이다. 그렇지만 저렇게 완강히 나오는 아카시는 마유즈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 몸 상태로 책을 읽어봤자 온전히 집중하기도 힘들긴 하겠지. 마유즈미는 아쉬운 내색을 하며 읽던 책을 덮었다.
"――마유즈미 씨, 몇 가지 검사를 받아보셨으면 하는데요."
"네…?"
마유즈미는 자신의 증상이 흔히 지나가는 감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병원을 찾아가면 의사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검사라니. 그럼 평범한 감기가 아니란 건가? 마유즈미는 당황스러웠다.
"저, 무언가 큰 병이 의심되는 건가요?"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할 거 같군요."
마유즈미를 따라 같이 병원에 온 아카시가 혼란스러워하는 마유즈미 대신 물어보면 의사는 난색을 보일 뿐 제대로 된 답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마유즈미는 더욱 불안해진다. 진료실을 나오면 아카시가 말없이 손을 잡아주었다. 그 온기에 마유즈미는 조금 안심한다.
이후 마유즈미는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무엇을 위한 검사인지 검사를 하는 의사나 간호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다들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말하기 어렵다는 소리뿐이었다. 검사를 마칠 때까지도 아카시가 마유즈미의 옆에 있어 주었다. 그 존재에 안심이 되면서도 마유즈미는 초조하게 아카시와 함께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마유즈미 치히로씨는 현재 임신 중이십니다."
"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검사 결과였건만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잘 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임신이라고 했었지. 임신? 누가? 내가? 스턴이 걸린 듯 마유즈미는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유즈미는 분명 남자였다. 임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방금 의사의 발언은 그런 마유즈미의 상식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역시 무언가 착오가 있던 게 아닐까. 아니면 설마 아카시와 병원이 짠 몰래카메라라도 되는 건가? 옆에 있는 아카시쪽을 돌아보면 아카시도 놀란 건 마찬가지인 듯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저는 남자인데, 임신할 리가……."
"…놀라시는 것도 이해합니다만, 진정하고 들어주세요."
마유즈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의사가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나간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극히 희귀한 사례긴 하나 남성이 임신하는 사례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마유즈미는 그 희귀한 사례 중 하나라는 거 같았다. 아이의 아버지로 누군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냐고 의사가 물었을 때 마유즈미는 옆에 있는 아카시를 보는 거밖에 할 수 없었다. 별다르게 짐작 가는 사람은 없다. 아카시 뿐이다. 그러니 아마 아카시의 아이겠지.
옥상에서 눈을 뜨면 항상 아카시가 있다. 그것을 당연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눈을 뜨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카시에 처음에는 매우 놀랐었지만, 지금은 마유즈미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이란 적응하는 생물이라고 했던가. 오히려 아카시가 없으면 허전함을 느낄 지경이다. 아카시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 또 구나. 잠이 덜 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아카시를 보며 마유즈미는 생각한다. 대체 아카시는 왜 옥상까지 올라와 자는 마유즈미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건지. 마유즈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옥상에 이렇게 올라올 시간도 있고. 학생회장님이 한가한가 봐?"
"이 시기엔 저라도 꽤 한가하거든요. 옥상에 올라올 시간 정도는 있습니다."
일부러 비꼬듯 말하면 아카시가 여유로운 듯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 한가한 시간에 굳이 왜 이 옥상에 올라오는 것인가. 아카시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해줄지도 모르지만, 마유즈미는 그만두기로 한다. 어차피 곧 있으면 졸업이다. 마유즈미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카시랑 이렇게 만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보다 제가 늘 말하지 않았나요. 옥상에서 자는 건 여러모로 위험하니깐 그만두는 게 좋다고."
"참견마. 이제 농구부도 은퇴했으니깐 네 말을 들을 이유도 없거든."
"그렇지만 여기서 이렇게 자다가는 감기에 걸릴 수도 있고 또 누군가 옥상에 들어오면……."
"이 정도 날씨에 감기 걸릴 정도로 몸이 약한 편은 아니거든. 거기에 이 옥상은 나 아니면 누가 들어올 사람도 없고. 누가 들어온다 해도 금방 깰 거니깐."
"하지만 제가 들어왔을 때는 안 깨셨잖아요?"
"그건……."
그렇게 말하면 반론할 말이 없어진다. 마유즈미는 꾸욱 입을 다문다. 잠귀는 밝은 편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 옥상에서는 제대로 자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들어오면 바로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아카시가 들어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것이 아카시 때문인지 아니면 마유즈미 자신의 문제인지는 마유즈미는 모른다. 아카시말고 마유즈미가 이 곳에서 자고 있을 때 옥상에 올라오는 사람은 이제껏 없어 다른 비교군은 없었다.
사실 마유즈미도 옥상에서 자려고 자는건 아니다. 입시가 막 끝난 뒤에 긴장이 풀려서 일까. 옥상에서 봄햇살을 맞다 보면 춘곤증이 밀려왔다. 아카시 말대로 아직 바람은 찬 편이기에 무심코 자다가는 감기에 걸릴 수도 있겠지. 무방비한 상태로 누군가 들어왔을 때 위험할 수도 있었다. 마유즈미 또한 위기 의식을 아에 안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잠이 쏟아지는 건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감기에 걸린적도 없고 자는 사이 무언가 도둑맞은 적도 없다. 애초에 이 옥상에 올라올 사람은 마유즈미와 아카시 정도. 낯선 사람이래 봤자 결국 학교 안이다. 금품 같은 건 들고 다닌 적도 없고 누군가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마유즈미에게 무언가 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카시는 늘 걱정된다는 듯이 잔소리를 하였지만, 마유즈미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 책이……."
마유즈미는 손안이 허전한 것을 지금에서야 알아챈다. 책을 읽다가 잠들었던 건 기억하고 있다. 따로 책을 어디에 놓지는 않았을 텐데. 일어났던 자세 그대로 마유즈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찾는 건 보이지 않는다.
"자, 여기요."
주변을 둘러봐도 찾는 책이 보이지 않아 조금 초조해질 즈음 불쑥 아카시에게서 책이 건네진다. 마유즈미가 읽던 그 책이다.
"…그걸 왜 네가 갖고 있어."
"아무래도 선배가 자다가 떨어뜨리신 거 같아서 주워놨습니다. 재밌던데요."
"읽었어…?!"
"네, 선배가 일어나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시간때우기로."
책을 건네주는 아카시가 생글거리며 웃음 짓는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손에서 책을 홱 뺏는다. 멋대로 남의 책을 읽은 걸 탓하고 싶지만 이제 와서 화내도 어쩔 수 없겠지. 마유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슬슬 들어갈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가 마유즈미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서 풀썩 넘어진다. 넘어질 때 제법 큰소리가 났다.
"마유즈미 선배, 괜찮으세요?"
"아, 응…."
마유즈미가 넘어지자 바로 근처에 있던 아카시가 놀라서 부축해온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요즘들어 옥상에서 자고 일어나면 종종 다리에 힘이 풀려 이렇게 넘어질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몸이 나른하고 무언가 몸에 위화감이 남았지만 마유즈미는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앉은 자세로 오래 잤기 때문에 힘이 풀린게 아닐까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다.
"그러길래 제가 말했잖아요? 조심하시는게 좋아요."
"……."
아카시의 말대로 조심하는 게 좋을지도….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아카시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며 마유즈미는 넌지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