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 천천히 부상한다. 아카시는 눈을 뜬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듯 방안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아카시는 기다린다. 앞에 있는 것이 보일 정도로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아카시는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카시의 바로 옆에 누군가 자고 있었다. 마유즈미였다. 바로 전에까지의 정사를 암시하듯 옷은 입지 않은 상태였다.
'치히로……'
마유즈미의 이름을 불렀으나 소리가 되진 않는다. 조금 괴로운 듯이 아카시가 미간을 찌푸린다. 마유즈미는 그저 규칙적인 숨소리만을 낼 뿐이다.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던가. 늘 보고 있었다. 다만 그건 의식의 저편에서. 겉으로 나와 마유즈미를 대한 건 어디까지나 또 다른 자신이다. 1년 동안 나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좋아한다는 고백에 대한 답을 들었던 것도, 방금 전 마유즈미와 정사를 나눈 것도, 모두 아카시 자신이었으나 지금의 아카시가 아니었다. 마유즈미를 라쿠잔의 식스맨으로 들여, 라쿠잔의 식스맨이 되게끔 훈련 시킨 건 지금의 아카시다. 그때 다른 쪽의 자신은 의식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터다. 상황이 반대가 됐군. 아카시는 쓴웃음을 짓는다.
조심스레 마유즈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손에 얽히는 마유즈미의 머리카락이 보드랍다. 이 감촉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그 시절 자신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은 역시 후회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라도 직접 만나보는 건 어때.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다른 쪽의 자신이었다.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깬 건가. 아카시는 조용히 고개를 흔든다. 때때로 또 한쪽의 자신은 이렇게 권유해왔다. 마유즈미를 직접 만나라고. 그때마다 아카시는 거절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유즈미와 만날 생각은 없다.
-나와 치히로가 맺었던 계약은 끝난 지 오래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치히로와 새롭게 관계를 쌓고 있는 건 내가 아닌 네 쪽이니깐.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아카시도 알고 있다. 그야 안에서 보고 있었으니깐. 하지만 그 말만으로 마유즈미가 지금의 아카시에게 무슨 감정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인정만으로는 아카시의 두려움은 가시지 않는다. 마유즈미를 직접 만나지 못하는 이유의 근원에는 아카시의 두려움이 있다. 마유즈미가 지금의 아카시를 어떻게 생각할지 아카시는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만약 마유즈미가 지금의 아카시를 경멸한다면. 경멸을 담은 마유즈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상상하고 아카시는 쓴웃음을 지었다. 몸이 조금 떨렸다.
"치히로……."
다시 마유즈미의 이름을 부른다. 이번에는 작지만 제대로 소리 낸다. 그렇지만 마유즈미에게는 닿지 않는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참을 수 없어져 아카시는 마유즈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