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6/무선제본/54p/5000원
-오레시를 애인으로 둔 마유즈미가 보쿠시랑 바람피우는 이야기 입니다. 외도 소재 주의
-본 회지는 미성년자 구독 불가로 2000년생 부터 구입가능합니다.
닫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볕이 따갑다. 감긴 눈가 위를 때리는 햇빛에 이끌려 마유즈미는 눈을 떴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마유즈미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인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머리로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의 방은 아니다. 숨소리가 들려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붉은 머리카락이 마유즈미 쪽을 보며 누워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침대 위에 있는 자신의 꼴과 옆에 있는 아카시를 보고 있자면 지난밤의 기억이 천천히 되살아난다. 머리가 지끈거려 마유즈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유는 간밤에 마셨던 술기운 탓만은 아닐 거다. 마유즈미는 한숨을 내뱉는다. 마유즈미의 한숨이 닿았는지 옆에 누워있는 아카시도 천천히 눈을 뜬다.
"좋은 아침, 치히로."
"그렇게 태평하게 인사할 때가 아니야. 어떡할 거야, 여기서 아침을 맞아버렸잖아."
"그게 뭐 어떻단 말이지. 어제 치히로와 여기에서 뜨거운 밤을 보냈으니 같이 아침도 맞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건……."
아카시의 태연한 반응에 마유즈미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제일 문제란 말이야,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뜨거운 밤, 아카시의 말이 스위치가 되어 뇌리에 어젯밤의 정사가 떠오른다. 확실히 뜨거운 밤이었다. 열에 삼켜져 흐물흐물 녹아버릴 정도로. 이미 지나간 일이건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유즈미는 얼굴을 가리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치히로만 좋다면 지금 어젯밤 일의 계속을 해도 난 상관없는데."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아카시가 가까이 다가와 마유즈미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댄다. 갑자기 다가온 아카시에 일순 당황했지만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여기서 저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간 저 녀석 뜻대로 끌려다닐 뿐이란 건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럴 시간 없어."
"외박한 걸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어차피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니 슬슬 익숙해지는 게 좋을 텐데."
"……."
확실히 아카시의 말대로다. 어젯밤 같은 일도, 오늘 같은 아침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 익숙해지냐는 것은 별개였다. 이런 상황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옆에 있는 아카시의 얼굴을 보자니 가슴 한쪽에서 죄의식이 마유즈미를 은은하게 누른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마유즈미는 눈썹을 찡그린다.
"아직도 사소한 걸 신경 쓰고 있다니 치히로는 귀엽네."
마유즈미의 속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아카시가 말을 걸어온다. 사소하기는. 엄청나게 큰 문제거든. 그렇게 반론하는 대신 마유즈미는 얼굴을 돌렸다. 사소한 반항이었지만 아카시가 피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마유즈미의 얼굴을 잡았다. 아카시는 그대로 마유즈미에게 입을 맞춘다. 이번에는 아카시를 막지 않았다.
문을 열기 전, 마유즈미는 심호흡을 했다. 본인의 집에 들어가는 데도 마음 편히 들어가지 못한다니, 우스운 일이지만 집 안에 있을 동거인을 생각하면 마유즈미의 몸은 절로 움츠려졌다. 문을 앞에 두고 다시 휴대전화의 화면을 확인한다. 부재중 전화 내역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쌓여있었다. 발신인은 모두 아카시 세이쥬로. 역시 오면서 미리 전화라도 한 통 하는 게 좋았으려나. 내심 후회했지만 이미 집 앞에 도착한 이상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한 번 더 심호흡하고 마유즈미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다녀왔어."
현관을 들어서며 슬며시 말해보았지만, 안쪽에서의 반응은 없다. 설마 지금 집에 없는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 현관에 놓여있는 마유즈미의 것이 아닌 신발 한 짝. 거기에 마유즈미의 동거인은 문이 열린 채로 그대로 나갈 정도로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이건 아마 일부러 열어둔 거겠지. 마유즈미가 올 때를 기다리며.
집 안의 이상할 정도의 고요에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유즈미가 천천히 거실 안으로 들어서면 소파에 앉아있는 동거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역시 나간 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저기 앉아서 밤새 마유즈미를 기다린 걸까. 보이는 건 뒷모습뿐이었으므로 동거인이 어떤 표정을 하는지, 마유즈미로서는 알 수 없었다.
마유즈미가 가까이에 있는 걸 분명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도 동거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반응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유즈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래서야 잘못을 한 채 교무실로 불려 나간 학생 같다. 마유즈미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마냥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어째거나 잘못을 한 건 맞으니깐.
역시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까. 고민하며 쭈뼛쭈뼛 소파 근처로 다가가 입을 열려는 순간 팔을 홱 잡혔다. 미처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마유즈미는 소파로 밀려 넘어뜨려 진다. 시야가 순식간에 반전되고 눈앞에 붉은 눈동자 두 개가 마유즈미를 보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혹시 아시나요, 마유즈미 선배."
"음, 글쎄. 아침 9시 40분인가…?"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닙니다."
마유즈미의 어깨를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역시 화가 나 있다. 잡힌 마유즈미의 몸이 움찔 떨린다.
"그… 미안, 아카시……."
여기선 변명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마유즈미는 순순히 사과하기로 했다. 붉은 눈이 마유즈미를 노려본다. 그 시선을 맞부딪치기 힘들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도 힘이 빠졌다.
"…아시면 됐어요."
마유즈미를 위에서 누르던 무게가 사라진다. 내심 안심한 마유즈미는 머쓱하게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어젯밤엔 대체 뭘 하느냐 제 전화도 안 받으시다가 이제야 들어오신 거죠.”
“그게 말이지…어제 동아리에 동기 모임이 있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길어…져서……."
"제 전화를 받지 못할 정도로 취했었단 소린가요……. 그럼 어젯밤엔 대체 어디서 주무셨던 거죠."
"동기 중 하나 집에……."
"하……."
아카시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마유즈미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연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역시 썩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마유즈미는 시선을 내린다.
동아리 모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마유즈미는 현재 대학의 컴퓨터 취미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가볍게 술자리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모임은 금방 파했다. 모임의 일원 중 하나가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를 갑자기 떠올린 탓이었다. 허전함을 품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그 녀석의 연락이 왔다. 그 연락을 받을 때만 해도 마유즈미는 외박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빈 시간을 때울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그 녀석이 내온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지나간 일은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지만 그럼에도 후회되는 일은 있다. 술은 그리 강한 편은 아니지만, 와인 한 잔쯤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고 입에 댔다. 그것이 오산이었음을 마유즈미가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와인에 무언가를 탄 것인지, 아니면 원래 도수가 높은 와인이였던건지 와인 한잔만으로 마유즈미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마유즈미는 그대로 침대로 이끌렸다. 그리고 그다음은…그다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전개다. 계속 울려댔을 휴대폰의 벨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취했던 것도 맞긴 하나, 결국은 거짓말이다.
이런 급조한 변명에 납득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마유즈미의 말을 듣고도 굳은 표정은 풀릴지를 모른다. 정말 이 수밖에 없나…. 마유즈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굳힌다.
"그, 오늘은 이걸로 봐주라. 응? 아카시."
“네? 그게 무슨…”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카시의 얼굴을 잡고 마유즈미는 그대로 입을 맞춘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아카시는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받아들이고 연인들의 짧은 입맞춤이 이어진다. 맞춰진 숨결이 조금 뜨겁다.
"…오늘은 이걸로 넘어가지만, 다음번에 외박할 때는 연락이라도 제대로 주세요."
입을 뗐을 땐 방금까지 느껴졌던 서늘함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대신 보이는 건 수줍게 뺨을 붉히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 자체이건만, 연인을 보며 마유즈미의 한편은 자괴감에 빠진다. …최악이야, 마유즈미 치히로.
형이 화를 내거든 이렇게 하도록 해. 분명 화를 풀 테니까.
―――그 녀석이, 아카시가 그렇게 말했었지. 확실히 그 말대로였지만 마유즈미 마음속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사람이다. 관념적인 표현이나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사람이었다. 같은 날 같은 시 한배에서 세상에 나온 형제. 세간에선 그걸 쌍둥이라 부른다. 그중에서도 아카시는 일란성 쌍둥이였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세상 밖에 나올 때 둘로 나온 이상 엄연히 다른 사람이지만 이 형제는 같은 이름을 썼다. 형제가 왜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인지는 마유즈미로서는 자세한 사정까진 알 수 없었으나 아마 집안 사정이 이유일 거라고 막연히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마유즈미에게는 둘 다 아카시였다. 형과 동생으로 구분하고 있긴 하지만 호칭을 정리할 필요성은 들지 않았다.
마유즈미가 이 형제를 처음 알게 된 건 3년 전, 고등학교에서다. 그때가 마유즈미가 3학년, 이 아카시 형제가 1학년이었다. 농구를 그만둘 생각으로 농구부에 퇴부서까지 냈건만 마유즈미에게 아카시가 찾아왔다. 동생 쪽의 아카시였다. 그 손에 이끌려 다시 농구를 시작했다. 그 뒤로 파란만장하다면 파란만장한 1년. 3학년인 마유즈미는 졸업했다. 진학은 교토의 국립대학교에 들어갔다. 교토에 있는 대학이었지만 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터라 대학생이 된 마유즈미는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레 이 형제와 멀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마유즈미의 오산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마유즈미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던 이 형제는 마유즈미가 졸업했어도 마유즈미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따로 말해주지도 않았건만 마유즈미가 자취하는 곳까지 찾아와 마유즈미를 불러내 기어코 얼굴을 보고 돌아갔다.
그리고 대학 생활도 익숙해질 무렵, 마유즈미는 아카시에게 고백받았다. 고백한 건 형 쪽의 아카시다. 그때 마유즈미가 당황했던 건 그동안 아카시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단 사실 때문이 아니다. 마유즈미를 제일 당황하게 만든 건 아카시의 고백을 들은 마유즈미 자신의 심정이다. 그때까지는 한 번도 아카시를 연애적인 감정으로 본 적 없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던 게 맞을까. 분명 그랬을 터인데, 그 순간 마유즈미는 아카시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카시의 고백에 대한 대답의 대신이었다. 첫 키스의 맛은 짰다.
올해부터는 아카시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닌다. 그것을 계기로 둘이 같이 살 방을 구했다. 이른바 연인끼리의 동거지만 대학생들끼리 룸쉐어를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함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순조로운 연인 생활이었다.
그래, 한 달 전까지는 분명 그랬지. 순조롭기만 한 연인 생활에 균열이 간 건 역시 그날 이후다. 그날을 생각하면 마유즈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서 오세요, 마유즈미 선배.
아카시가 온화히 웃으며 현관으로 나왔다. 아르바이트를 막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마유즈미를 아카시가 맞이하는 건 언제나의 일이었다. 아카시를 보는 마유즈미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대로 대꾸하지 않고 아카시를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서면 아카시도 따라 들어왔다. 마유즈미가 외투와 가방을 벗고 거실의 소파에 앉으면 아카시도 역시 따라서 마유즈미의 옆에 앉았다. 마유즈미는 옆의 아카시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흘끗 쳐다볼 뿐, 마유즈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카시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유즈미의 미간이 좁혀진다.
"선배,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건가요?"
"……별로."
"아니면 혹시 저한테 화나신 거라도?"
아카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마유즈미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카시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마유즈미는 혀를 찼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태연한 얼굴에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쳇, 뻔뻔한 거에도 정도가 있지.
"마유즈미 선배…?"
아카시가 다시금 의아한 시선으로 마유즈미를 보며 거리를 좁혀온다. 마유즈미가 여전히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아카시가 슬쩍 마유즈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온다. 여기까지 호면 마유즈미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마유즈미는 겹쳐진 손을 홱 뺐다.
"이건 또 무슨 질 나쁜 장난질이야. 다른 아카시는 어디 있어."
"다른 아카시라니, 무슨 소리신가요? 혹시 동생 말인가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아카시의 얼굴에 마유즈미는 다시 혀를 찼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그 시답잖은 연극을 계속할 셈이야? 이건 또 무슨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작 눈치챘으니깐 네 형인 척하는 건 그만두지 그래, 아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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