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며 욕실에서 나온다. 시계를 보면 올 시간이 지나있었다. 마유즈미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은 아카시가 마유즈미의 집으로 온다고 약속한 날이었다. 아카시가 약속을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이럴 땐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오늘, 아카시가 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상상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비참한 모습은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밤새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 그 끝까지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딩동―’
사고가 좀 더 안 좋은 곳으로 빠지기 전, 벨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마유즈미가 사는 오피스텔로 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벨을 누른 손님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 집의 열쇠는 이미 예전에 복사해서 줬건만 아카시는 쓰지 않았다. 마치 이 집에서 금방이라도 떠나갈 손님이라는 듯이.
바로 현관문을 열어주면 기다리고 있던 붉은색이 시야에 가득 찬다. 아카시 세이쥬로. 마유즈미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연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마유즈미 선배.”
“…일단 들어와.”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거래처와의 미팅이 예정보다 길어져서.”
“별로… 괜찮아.”
아카시가 현관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마유즈미는 몸을 훽 돌았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을 내디디면 등 뒤에서 맞대 오는 온기가 있다. 마유즈미의 허리에 아카시의 팔이 감겼다.
“연인에게 너무 쌀쌀 맞네요. 제가 늦어서 화났어요?”
“괜찮다고 했잖아. 그런거 아니야.”
“그치만 마유즈미 선배 기분 나빠 보이시는데.”
“…….”
아카시의 말이 마유즈미가 입을 꾸욱 닫고, 주먹을 쥔다. 마유즈미가 화가 난 대상은 아카시가 아니다. 화가 난건 자신 때문이다. 혹시라도 아카시가 오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던 자신의 비참함에. 하지만 이것을 아카시에게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마유즈미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아카시는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허리에서 손을 푼 아카시가 마유즈미의 왼손을 잡았다.
“뭐, 기분이야 지금부터 풀면 되니깐요.”
아카시가 잡은 손을 이끌면 마유즈미의 몸은 맥없이 끌려간다. 이 오피스텔의 집주인은 마유즈미건만 마치 자신이 집주인이 되는 것 마냥, 아카시는 익숙하게 마유즈미를 이끌고 침실로 향한다. 불평을 말할 새도 없이 방에 도착하면 마유즈미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바로 이어 아카시의 몸 또한 침대 위로 쓰러진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진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마유즈미는 눈을 감았다.
(중략)
“괜찮아요?”
“응…….”
걱정스러운 듯 아카시가 마유즈미에게 물병을 건넨다. 그 뒤로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결국 마유즈미는 뻗어버렸다. 뻗어버린 마유즈미를 대신해서 뒷정리를 한 건 아카시다.
아카시가 건네준 물을 마시고 수분보충을 하면 긴장이 풀려서일까.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옆에 누워 있는 아카시에게 슬쩍 몸을 기대면 노곤노곤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을텐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소문이라는 것은 대체로 허무맹랑한 것이 많다. 그 사실을 아카시는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건 아카시가 그 허무맹랑한 소문의 당사자가 된 적이 많기 때문일 터다. 태생부터 남들 눈에 주목을 받는 일이 많았던 아카시에게는 늘 뒤따르는 소문이 많았다. 소문에는 사실도 더러 섞여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체로 사실무근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많았다. 소문에 의하면 아카시는 외국에서 온 이름없는 나라의 왕자가 된 적도 있었으나 당연하게도 근거없는 헛소문이었다. 당사자가 들었을 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사실무근의 소문이었으나 개중에는 진지하게 그 소문을 믿는 자들도 있었다. 이외에도 아카시를 둘러싼 소문은 무수히 많았고 그럴듯해보이는 소문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러나 아카시는 남들 앞에서 먼저 소문의 내용을 정정하거나 소문을 신경쓰는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왜냐면 소문이란 그런 것이니까. 소문이란건 본래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커지고 부풀려지기 마련이었다. 그렇게되면 아무리 소문의 당사자라고 해도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오히려 내버려두면 근거없는 소문은 저절로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아카시는 요근래 들려오는 소문에 대해서도 믿지않았다. 어차피 소문일 뿐이다. 언제나처럼 사실과 관련 없는 얘기들일 뿐이겠지. 그렇지만 역시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신과 관련된 소문은 아니다. 만약 아카시 본인과 관련된 소문이었다면 믿고 자시고도 없이 사실 여부 판명은 진작 나왔을 테지. 소문은 마유즈미 치히로, 아카시가 농구부에 영입했던 그에 관련된 소문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질 낮은 소문 따위, 언제나처럼 내버려 두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아카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믿지는 않지만, 소문에 대한 근원지 정도는 파악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방금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 일어선다. 학생회실 책상 위에 졸업식 계획이란 이름의 서류가 놓여있었다.
“—오셨군요.”
빈 교실에서 창밖을 보던 아카시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다. 시선의 끝에는 심기 불편해보이는 마유즈미가 문을 열며 서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카시의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이내 조용히 미소 짓는다.
“부름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오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나 참, 졸업 앞 둔 선배를 오라가라 하고 말이지. 게다가 이런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서 만나자고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야?”
“다름이 아니라 선배께서도 곧 졸업이시니 마지막으로 졸업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거 같아서요. 마유즈미 선배와는 이래저래 많은 일이 있었으니깐요.”
“마지막으로 할 말? 뭐어, 너한테는 요 1년 동안 꽤 신세를 진 편이었지. 나도 졸업 전에 너랑 이야기하고 싶었어. 그렇지만 왜 굳이 이런 빈교실에서 보자고 한거야?”
“그거야 따로 시간을 내 학교 바깥에서 보자고 했으면 안오셨을 테니깐요. 거기다… 가능하면 선배한테는 아무도 없이 단둘이 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잠깐이라면 못해줄 것도 없긴 하지만.”
마유즈미는 간단히 수긍하고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아카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하듯 주의 깊게 보았지만 마유즈미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이내 아카시가 다시 표정을 고치고 입을 연다.
“—선배의 졸업까지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졸업준비는 잘하고 있으신 건가요?”
“나야 뭐 졸업 준비래봤자 딱히 할 것도 없잖아? 이미 수험도 끝났으니까. 그보다 네 쪽이 더 바쁜 거 아닌가? 학생회일에 농구부일까지 바쁜 시기일 텐데 나랑 이렇게 얘기할 시간이 있는 거야?”
“그렇네요. 확실히 바쁜 시기인 것은 맞습니다만 이정도 얘기할 시간정도는 있습니다. 마유즈미 선배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 붙으셨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그럼 이제 도쿄에서 자취하시는 건가요?”
“뭐,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통학할 수는 없으니까. 태어나서 이제껏 여기서만 살다가 처음 하는 자취라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후후, 선배도 그런 불안함을 느끼시네요.. 그럼 나중에 도쿄에 가게 되면 선배네 집으로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우리 집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오는 거라면… 뭐어, 손님 접대 정도는 해줄게.”
“감사합니다. 만약 마유즈미 선배께서 초대해주신다면 기꺼이 가보도록 하죠.”
“초대해줄 생각은 없거든. 오는 걸 안막는 다고 했을 뿐이니까.”
“그래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저로선 그거면 충분하니까.”
“나 참… 근데 겨우 이런 얘기를 하자고 여기까지 부른 거야?”
마유즈미가 맥 빠진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카시를 바라본다. 그 모습에 아카시가 입가에 희미하게 웃을을 띄운다. 그런 아카시의 반응이 의아해 마유즈미는 목을 한쪽으로 기울인다.
“사실 이 자리는 마유즈미 선배와 얘기를 나누기 위한 것보다는 제가 마유즈미 선배에게 확인하기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확인? 나한테?”
“네. 그리고 방금 확인했습니다.”
아카시가 시선을 올려 마유즈미와 눈을 맞춘다. 아카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확실한 적대감을 가지고 마유즈미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변한 아카시의 분위기에 마유즈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 모습 또한 아카시는 놓치지 않았다. 아카시가 한층 더 마유즈미를 노려보면 마유즈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잘 모르겠지만 확인인지 뭔지는 끝난 거지? 그럼 난 선약이 있어서 이만…”
――쿵!!
아카시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마유즈미가 이만 교실을 나가기 위해서 몸을 돌린 것과 아카시가 마유즈미를 벽으로 밀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카시에게 붙잡힌 마유즈미가 아카시를 떨쳐버리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아카시의 악력에 몸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아카시는 여전히 마유즈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유즈미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다시 아카시를 떨치기 위해 몸부림쳤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약속 장소에 가봤자 소용없어요. 그 장소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왜냐면 제가 취소시켰거든요.”
“뭐?!”
약속을 취소시켰다는 말에 마유즈미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 모습을 보자 더욱 심기가 나빠진 아카시가 마유즈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준다.
“최근 라쿠잔 내에서 도는 소문이 있죠. 당신과 관련된 소문입니다. 짐작 가는 건은 없으십니까?”
“…글쎄.”
마유즈미가 아카시의 눈을 피한다. 아직도 시치미를 뗄 생각인가. 괘씸함에 아카시의 분노가 인다.
“당신과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말하더군요. ‘농구부였던 마유즈미 치히로는 요구하면 상대가 누구든 몸을 열어준다.’, 라고.”
기어코 직접 입에 담아버린 말이었다. 이 말은 그간 소문의 내용과도 일치했다. ‘마유즈미 치히로는 누구에게든 상대가 요구하면 그 몸을 내어준다. 성적인 의미로서.’ 그런 소문이었다. 그야말로 상스럽고 천박한 소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소문, 아카시는 믿지 않았지만, 그 대상이 마유즈미라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카시는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버렸다. 마유즈미를 사용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는 라쿠잔 학생이었다. 마유즈미와 ‘약속’을 잡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닌 거 같은 그에게 협박하여 마유즈미와 더는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낼 수 있었지만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확증 또한 찾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증거 또한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의 핸드폰을 보면 마유즈미와 행위 중 찍었던 사진과 영상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아카시는 그 핸드폰에서 데이터를 모조리 삭제했지만, 사진이 존재했었다는 사실까지는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카시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번에는 마유즈미 본인에게. 그리고 확인은 방금 끝났다.
“소문의 내용에는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몸을 내어주는 마유즈미 치히로는 평소의 마유즈미 치히로와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고.”
아카시가 마유즈미를 똑바로 노려본다. 이번에는 마유즈미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새 당황하던 기색은 사라졌다. 흥미롭다는 듯이 웃음을 띤 채로 아카시를 내려보고 있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그것은 언젠가 마유즈미에게 들었던 말. 하지만 그때와 의미가 달랐다. 그때의 마유즈미는 한심한 꼴을 보인 마유즈미를 책망하기 위해 그런 말을 썼으니까. 그때의 마유즈미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둘인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아카시는 정말로 눈앞에 마유즈미가 다른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카시 또한 알 수 없었지만.
풉. 순간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유즈미였다. 푸하하하하! 작게 터진 웃음은 이윽고 큰 웃음소리가 된다. 무엇이 그리 웃긴 지 마유즈미가 교실이 울릴 정도로 웃자 아카시의 인상이 구겨진다. 웃음소리는 이윽고 멈췄지만 마유즈미는 여전히 즐겁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미안미안, 어쩐지 웃겨서. 그보다 그 대사를 네 쪽에서 하는구나, 도련님. 나는 당연히 마유즈미 치히로야. 라고 해도 믿어줄 얼굴이 아니네?”
최근 마유즈미는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다. 마유즈미와 살고 있는 것도 햇수로 몇 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드물었다. 지금도 마유즈미는 책을 펼쳐놓은 채 멀거니 책 페이지만을 보고 있었다. 책을 넘기는 손은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 저건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겠지.
"열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어……?"
지켜보던 아카시가 보다못해 불쑥 한마디를 꺼내면 마유즈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마유즈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마유즈미의 이마에 아카시가 자신의 손을 올린다. 미열이긴 하지만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도가 뜨겁다.
"미열이긴 하지만 열이 있긴 한 거 같네요."
"그러고 보니 요새 몸이 꽤 나른했던 거 같기도 하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됐어, 이 정도는 쉬면 나아."
아카시가 걱정스레 제안하면 마유즈미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카시의 눈이 못마땅한 듯이 가늘어진다.
"병원은 제때 가는 게 좋아요."
"정말 괜찮다니깐, 이 정도는."
"아무리 그래도 가보시는 게 좋아요. 작은 병이라고 방심했다가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저희 어머니도 처음에는 작은 병이었는데……."
"……."
어머니의 얘기를 꺼내면 아카시는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 모습을 보는 마유즈미는 곤란해진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갈 수도 없었다. 포기한 듯 마유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그래도 지금은 밤이니깐… 내일도 몸이 나른하고 열이 있다 싶으면 갈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병원부터 가보죠. 저도 내일은 휴가 낼 테니까."
"벌써? 나 아직 이 책 다 못 읽었는데."
"쉬는 게 먼저예요."
아카시는 단호하다. 시계를 보면 시침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밤이긴 하지만 잠들기도 이른 시간이다. 그렇지만 저렇게 완강히 나오는 아카시는 마유즈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 몸 상태로 책을 읽어봤자 온전히 집중하기도 힘들긴 하겠지. 마유즈미는 아쉬운 내색을 하며 읽던 책을 덮었다.
"――마유즈미 씨, 몇 가지 검사를 받아보셨으면 하는데요."
"네…?"
마유즈미는 자신의 증상이 흔히 지나가는 감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병원을 찾아가면 의사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검사라니. 그럼 평범한 감기가 아니란 건가? 마유즈미는 당황스러웠다.
"저, 무언가 큰 병이 의심되는 건가요?"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할 거 같군요."
마유즈미를 따라 같이 병원에 온 아카시가 혼란스러워하는 마유즈미 대신 물어보면 의사는 난색을 보일 뿐 제대로 된 답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마유즈미는 더욱 불안해진다. 진료실을 나오면 아카시가 말없이 손을 잡아주었다. 그 온기에 마유즈미는 조금 안심한다.
이후 마유즈미는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무엇을 위한 검사인지 검사를 하는 의사나 간호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다들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말하기 어렵다는 소리뿐이었다. 검사를 마칠 때까지도 아카시가 마유즈미의 옆에 있어 주었다. 그 존재에 안심이 되면서도 마유즈미는 초조하게 아카시와 함께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마유즈미 치히로씨는 현재 임신 중이십니다."
"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검사 결과였건만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잘 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임신이라고 했었지. 임신? 누가? 내가? 스턴이 걸린 듯 마유즈미는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유즈미는 분명 남자였다. 임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방금 의사의 발언은 그런 마유즈미의 상식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역시 무언가 착오가 있던 게 아닐까. 아니면 설마 아카시와 병원이 짠 몰래카메라라도 되는 건가? 옆에 있는 아카시쪽을 돌아보면 아카시도 놀란 건 마찬가지인 듯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저는 남자인데, 임신할 리가……."
"…놀라시는 것도 이해합니다만, 진정하고 들어주세요."
마유즈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의사가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나간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극히 희귀한 사례긴 하나 남성이 임신하는 사례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마유즈미는 그 희귀한 사례 중 하나라는 거 같았다. 아이의 아버지로 누군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냐고 의사가 물었을 때 마유즈미는 옆에 있는 아카시를 보는 거밖에 할 수 없었다. 별다르게 짐작 가는 사람은 없다. 아카시 뿐이다. 그러니 아마 아카시의 아이겠지.
닫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볕이 따갑다. 감긴 눈가 위를 때리는 햇빛에 이끌려 마유즈미는 눈을 떴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마유즈미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인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머리로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의 방은 아니다. 숨소리가 들려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붉은 머리카락이 마유즈미 쪽을 보며 누워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침대 위에 있는 자신의 꼴과 옆에 있는 아카시를 보고 있자면 지난밤의 기억이 천천히 되살아난다. 머리가 지끈거려 마유즈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유는 간밤에 마셨던 술기운 탓만은 아닐 거다. 마유즈미는 한숨을 내뱉는다. 마유즈미의 한숨이 닿았는지 옆에 누워있는 아카시도 천천히 눈을 뜬다.
"좋은 아침, 치히로."
"그렇게 태평하게 인사할 때가 아니야. 어떡할 거야, 여기서 아침을 맞아버렸잖아."
"그게 뭐 어떻단 말이지. 어제 치히로와 여기에서 뜨거운 밤을 보냈으니 같이 아침도 맞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건……."
아카시의 태연한 반응에 마유즈미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제일 문제란 말이야,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뜨거운 밤, 아카시의 말이 스위치가 되어 뇌리에 어젯밤의 정사가 떠오른다. 확실히 뜨거운 밤이었다. 열에 삼켜져 흐물흐물 녹아버릴 정도로. 이미 지나간 일이건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유즈미는 얼굴을 가리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치히로만 좋다면 지금 어젯밤 일의 계속을 해도 난 상관없는데."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아카시가 가까이 다가와 마유즈미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댄다. 갑자기 다가온 아카시에 일순 당황했지만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여기서 저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간 저 녀석 뜻대로 끌려다닐 뿐이란 건 그동안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럴 시간 없어."
"외박한 걸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어차피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니 슬슬 익숙해지는 게 좋을 텐데."
"……."
확실히 아카시의 말대로다. 어젯밤 같은 일도, 오늘 같은 아침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 익숙해지냐는 것은 별개였다. 이런 상황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옆에 있는 아카시의 얼굴을 보자니 가슴 한쪽에서 죄의식이 마유즈미를 은은하게 누른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마유즈미는 눈썹을 찡그린다.
"아직도 사소한 걸 신경 쓰고 있다니 치히로는 귀엽네."
마유즈미의 속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아카시가 말을 걸어온다. 사소하기는. 엄청나게 큰 문제거든. 그렇게 반론하는 대신 마유즈미는 얼굴을 돌렸다. 사소한 반항이었지만 아카시가 피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마유즈미의 얼굴을 잡았다. 아카시는 그대로 마유즈미에게 입을 맞춘다. 이번에는 아카시를 막지 않았다.
문을 열기 전, 마유즈미는 심호흡을 했다. 본인의 집에 들어가는 데도 마음 편히 들어가지 못한다니, 우스운 일이지만 집 안에 있을 동거인을 생각하면 마유즈미의 몸은 절로 움츠려졌다. 문을 앞에 두고 다시 휴대전화의 화면을 확인한다. 부재중 전화 내역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쌓여있었다. 발신인은 모두 아카시 세이쥬로. 역시 오면서 미리 전화라도 한 통 하는 게 좋았으려나. 내심 후회했지만 이미 집 앞에 도착한 이상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한 번 더 심호흡하고 마유즈미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다녀왔어."
현관을 들어서며 슬며시 말해보았지만, 안쪽에서의 반응은 없다. 설마 지금 집에 없는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 현관에 놓여있는 마유즈미의 것이 아닌 신발 한 짝. 거기에 마유즈미의 동거인은 문이 열린 채로 그대로 나갈 정도로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이건 아마 일부러 열어둔 거겠지. 마유즈미가 올 때를 기다리며.
집 안의 이상할 정도의 고요에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유즈미가 천천히 거실 안으로 들어서면 소파에 앉아있는 동거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역시 나간 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저기 앉아서 밤새 마유즈미를 기다린 걸까. 보이는 건 뒷모습뿐이었으므로 동거인이 어떤 표정을 하는지, 마유즈미로서는 알 수 없었다.
마유즈미가 가까이에 있는 걸 분명 눈치채고 있었을 텐데도 동거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반응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유즈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래서야 잘못을 한 채 교무실로 불려 나간 학생 같다. 마유즈미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마냥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어째거나 잘못을 한 건 맞으니깐.
역시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까. 고민하며 쭈뼛쭈뼛 소파 근처로 다가가 입을 열려는 순간 팔을 홱 잡혔다. 미처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마유즈미는 소파로 밀려 넘어뜨려 진다. 시야가 순식간에 반전되고 눈앞에 붉은 눈동자 두 개가 마유즈미를 보고 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혹시 아시나요, 마유즈미 선배."
"음, 글쎄. 아침 9시 40분인가…?"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닙니다."
마유즈미의 어깨를 쥐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역시 화가 나 있다. 잡힌 마유즈미의 몸이 움찔 떨린다.
"그… 미안, 아카시……."
여기선 변명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마유즈미는 순순히 사과하기로 했다. 붉은 눈이 마유즈미를 노려본다. 그 시선을 맞부딪치기 힘들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도 힘이 빠졌다.
"…아시면 됐어요."
마유즈미를 위에서 누르던 무게가 사라진다. 내심 안심한 마유즈미는 머쓱하게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어젯밤엔 대체 뭘 하느냐 제 전화도 안 받으시다가 이제야 들어오신 거죠.”
“그게 말이지…어제 동아리에 동기 모임이 있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길어…져서……."
"제 전화를 받지 못할 정도로 취했었단 소린가요……. 그럼 어젯밤엔 대체 어디서 주무셨던 거죠."
"동기 중 하나 집에……."
"하……."
아카시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마유즈미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연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역시 썩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마유즈미는 시선을 내린다.
동아리 모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마유즈미는 현재 대학의 컴퓨터 취미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가볍게 술자리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모임은 금방 파했다. 모임의 일원 중 하나가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를 갑자기 떠올린 탓이었다. 허전함을 품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그 녀석의 연락이 왔다. 그 연락을 받을 때만 해도 마유즈미는 외박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빈 시간을 때울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그 녀석이 내온 와인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지나간 일은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지만 그럼에도 후회되는 일은 있다. 술은 그리 강한 편은 아니지만, 와인 한 잔쯤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고 입에 댔다. 그것이 오산이었음을 마유즈미가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와인에 무언가를 탄 것인지, 아니면 원래 도수가 높은 와인이였던건지 와인 한잔만으로 마유즈미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마유즈미는 그대로 침대로 이끌렸다. 그리고 그다음은…그다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전개다. 계속 울려댔을 휴대폰의 벨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취했던 것도 맞긴 하나, 결국은 거짓말이다.
이런 급조한 변명에 납득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마유즈미의 말을 듣고도 굳은 표정은 풀릴지를 모른다. 정말 이 수밖에 없나…. 마유즈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굳힌다.
"그, 오늘은 이걸로 봐주라. 응? 아카시."
“네? 그게 무슨…”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카시의 얼굴을 잡고 마유즈미는 그대로 입을 맞춘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아카시는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받아들이고 연인들의 짧은 입맞춤이 이어진다. 맞춰진 숨결이 조금 뜨겁다.
"…오늘은 이걸로 넘어가지만, 다음번에 외박할 때는 연락이라도 제대로 주세요."
입을 뗐을 땐 방금까지 느껴졌던 서늘함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대신 보이는 건 수줍게 뺨을 붉히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 자체이건만, 연인을 보며 마유즈미의 한편은 자괴감에 빠진다. …최악이야, 마유즈미 치히로.
형이 화를 내거든 이렇게 하도록 해. 분명 화를 풀 테니까.
―――그 녀석이, 아카시가 그렇게 말했었지. 확실히 그 말대로였지만 마유즈미 마음속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사람이다. 관념적인 표현이나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사람이었다. 같은 날 같은 시 한배에서 세상에 나온 형제. 세간에선 그걸 쌍둥이라 부른다. 그중에서도 아카시는 일란성 쌍둥이였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세상 밖에 나올 때 둘로 나온 이상 엄연히 다른 사람이지만 이 형제는 같은 이름을 썼다. 형제가 왜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인지는 마유즈미로서는 자세한 사정까진 알 수 없었으나 아마 집안 사정이 이유일 거라고 막연히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마유즈미에게는 둘 다 아카시였다. 형과 동생으로 구분하고 있긴 하지만 호칭을 정리할 필요성은 들지 않았다.
마유즈미가 이 형제를 처음 알게 된 건 3년 전, 고등학교에서다. 그때가 마유즈미가 3학년, 이 아카시 형제가 1학년이었다. 농구를 그만둘 생각으로 농구부에 퇴부서까지 냈건만 마유즈미에게 아카시가 찾아왔다. 동생 쪽의 아카시였다. 그 손에 이끌려 다시 농구를 시작했다. 그 뒤로 파란만장하다면 파란만장한 1년. 3학년인 마유즈미는 졸업했다. 진학은 교토의 국립대학교에 들어갔다. 교토에 있는 대학이었지만 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터라 대학생이 된 마유즈미는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레 이 형제와 멀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마유즈미의 오산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마유즈미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던 이 형제는 마유즈미가 졸업했어도 마유즈미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따로 말해주지도 않았건만 마유즈미가 자취하는 곳까지 찾아와 마유즈미를 불러내 기어코 얼굴을 보고 돌아갔다.
그리고 대학 생활도 익숙해질 무렵, 마유즈미는 아카시에게 고백받았다. 고백한 건 형 쪽의 아카시다. 그때 마유즈미가 당황했던 건 그동안 아카시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단 사실 때문이 아니다. 마유즈미를 제일 당황하게 만든 건 아카시의 고백을 들은 마유즈미 자신의 심정이다. 그때까지는 한 번도 아카시를 연애적인 감정으로 본 적 없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던 게 맞을까. 분명 그랬을 터인데, 그 순간 마유즈미는 아카시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카시의 고백에 대한 대답의 대신이었다. 첫 키스의 맛은 짰다.
올해부터는 아카시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닌다. 그것을 계기로 둘이 같이 살 방을 구했다. 이른바 연인끼리의 동거지만 대학생들끼리 룸쉐어를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함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순조로운 연인 생활이었다.
그래, 한 달 전까지는 분명 그랬지. 순조롭기만 한 연인 생활에 균열이 간 건 역시 그날 이후다. 그날을 생각하면 마유즈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서 오세요, 마유즈미 선배.
아카시가 온화히 웃으며 현관으로 나왔다. 아르바이트를 막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마유즈미를 아카시가 맞이하는 건 언제나의 일이었다. 아카시를 보는 마유즈미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대로 대꾸하지 않고 아카시를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서면 아카시도 따라 들어왔다. 마유즈미가 외투와 가방을 벗고 거실의 소파에 앉으면 아카시도 역시 따라서 마유즈미의 옆에 앉았다. 마유즈미는 옆의 아카시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흘끗 쳐다볼 뿐, 마유즈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카시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유즈미의 미간이 좁혀진다.
"선배,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건가요?"
"……별로."
"아니면 혹시 저한테 화나신 거라도?"
아카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마유즈미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카시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마유즈미는 혀를 찼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태연한 얼굴에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쳇, 뻔뻔한 거에도 정도가 있지.
"마유즈미 선배…?"
아카시가 다시금 의아한 시선으로 마유즈미를 보며 거리를 좁혀온다. 마유즈미가 여전히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아카시가 슬쩍 마유즈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온다. 여기까지 호면 마유즈미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마유즈미는 겹쳐진 손을 홱 뺐다.
"이건 또 무슨 질 나쁜 장난질이야. 다른 아카시는 어디 있어."
"다른 아카시라니, 무슨 소리신가요? 혹시 동생 말인가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아카시의 얼굴에 마유즈미는 다시 혀를 찼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그 시답잖은 연극을 계속할 셈이야? 이건 또 무슨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작 눈치챘으니깐 네 형인 척하는 건 그만두지 그래, 아카시."
짓눌리는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답답함에 몸을 뒤척여 보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거야 원, 단단히 잡혀버렸군. 남의 일처럼 멀거니 생각했다. 뒤척이려던 그 움직임마저도 그 녀석에게는 거슬렸던 걸까. 어깨를 잡고 있는 팔에 체중이 실린다. 으읏… 느껴지는 통증에 마유즈미는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뱉었다.
위를 올려보면 그 녀석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뭐가 재밌는 거야, 망할 자식. 떠오른 불평을 속으로 삼킨다. 대신 혀를 작게 찼다. 작은 소리였지만 저 녀석에게는 분명 들렸을 테지. 얼굴을 한층 더 구기고 있으면 오른쪽 뺨에 무언가 닿는다. 방금 전까지 마유즈미를 침대에 파묻고 있던 손이다. 뺨에 닿은 손은 그대로 얼굴을 쓰다듬는다 싶더니 손가락 끝으로 뺨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한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가만 내버려두고 있으면 움직임은 멈출 줄 모른다. 뺨이 찔러지는 감각이 그리 기분 좋지는 않다.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후후, 미안미안. 치히로가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무심코."
귀엽기는. 키 180이 훌쩍 넘는 건장한 체격의 성인남자가 대체 어디가. 그리고 마왕님 주제에 그렇게 쉽게 사과하지 말라고.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불평은 이번에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다. 아까처럼 속으로 삼켰기 때문은 아니다. 자신을 내려 보던 전 농구부 후배―― 아카시 세이쥬로가 소리를 내기 전에 마유즈미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세간에서는 입맞춤, 혹은 키스라고 부른다지. 결국 같은 말이다만. 보통은 연인끼리 하는 행위다. 어디까지나 보통은 그렇다. 보통은 그렇다는 것은 어딘가에는 예외가 있다는 소리지. 아카시와 자신은 그 예외에 속한 관계일 것이다. 아마도.
혀가 얽히고 타액이 얽힌다. 질척이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간질간질한 감각을 참지 못하고 마유즈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지금 아카시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눈을 감고 있는 마유즈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잡힌 얼굴이 조금 아파왔다. 삼켜질 듯한 입맞춤, 혹은 키스라고 불리는 그것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순간동안 이어졌다 아카시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아카시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은 키스의 끝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시작의 신호기도 했다.
모자란 산소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눈을 뜨면 여전히 자신을 덮고 있는 아카시의 얼굴이 보였다. 상기된 뺨에 열에 녹은 눈동자. 바보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아카시를 보는 자신 또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카시 세이쥬로도 저런 얼굴을 하는 구나. 마유즈미는 새삼 놀란다. 저런 아카시의 얼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까지도 마유즈미는 몰랐다. 저 얼굴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아. 마유즈미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잠깐, 몇 번이라고? 이게 처음이 아닌가? 아니아니, 그전에 왜 난 지금 이 상황에 가만히 있는 거야?
"치히로……."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들에 당황하고 있으면 뜨거운 숨결이 마유즈미의 이름을 부른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덩달아 자신의 숨결 또한 뜨거워지는 착각에 빠진다. 아니, 그건 착각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저도 모르게 내뱉어진 한숨은 분명 뜨거웠다. 방금 전 떠오른 의문 따윈 열기에 쉽사리 녹아버린다.
아카시의 얼굴이 다시 마유즈미에게로 다가온다. 또 입을 맞춰오려는 건가 싶어 질끈 눈을 감았지만 입술에 각오했던 충격은 오지 않는다. 대신 목에 무언가 닿았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면 목덜미에 달라붙은 아카시가 보인다. 쪼옥- 들으라는 듯이 과장된 입술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목을 덥석 문 아카시는 마유즈미의 목을 잘근 씹는다. 목덜미를 타고 전해지는 딱딱한 이의 감촉에 마유즈미의 몸은 굳는다.
(중략)
눈을 뜨면 침대 위였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이불 속부터 확인한다. 다행히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일은 없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유즈미는 그대로 쓰러져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또 그 꿈이다. 아카시의 꿈. 정확히는 아카시와……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마유즈미는 더 깊게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꿈에서 느껴졌던 통증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꿈의 기억은 바로 전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마유즈미의 꿈에 아카시가 나온다. 그것도 매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마유즈미의 인생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아카시 세이쥬로만큼 강렬한 인간은 없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그랬던 아카시니 만큼 어쩌다 꿈에 나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매일 꿈에 나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정한 인물이 매일 꿈에 나오는 건 흔한 일이던가? 아니 그럴리가 없지. 그런 이야기는 못들었다.
아카시가 매일 꿈에 나온 다해서 매일 똑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농구공을 사이에 두고 졸업 전, 아직 주장과 부원이었을 때처럼 호흡을 맞출 때도 있고 평범하게 차를 마시며 얘기할 때도 있었다. 모두 아카시가 나오는 꿈이었지만 꿈의 내용은 다양했다. 그렇지만 꿈속의 아카시와 가장 많이 하는 건…… 대체로는 오늘 꿈같은 것이지.
"대체 왜……"
베개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고 마유즈미가 중얼거린다. 왜 아카시는 매일 마유즈미의 꿈에 나타나는 걸까.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카시와는 이런 저런 일이 많긴 했지만 덕분에 고등학교 마지막 1년은 나쁘지 않았다고 정리했던 후배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유즈미는 올해 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계절은 벌써 가을을 넘어 겨울의 문턱을 밟고 있다. 졸업한 이후로 아카시와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로 연락한 적도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 연락한 적도 당연히 없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꿈은 무의식에 잠재된 욕구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라 했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언젠가 교양 수업에서 들었던 어느 심리학자의 주장이 떠올랐다. 그 주장을 마유즈미는 오늘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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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유즈미에게 반해버린 오레시랑 그걸 지켜보는 보쿠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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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이 얼마 안 남았다. 이 시기가 되면 학생회는 분주해진다. 1년에 한 번 있는 학교의 큰 행사다.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이 많았다. 덕분에 학생회장인 나 또한 평소보다 바빠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졸업식 진행에 대한 서류를 읽다 나는 창문을 바라본다. 창문을 통해 학생회장실에 햇빛이 쏟아 들어온다. 요 며칠 우중충하게 흐렸던 것을 생각하면 오래간만에 좋은 날씨다. 이 날씨라면 밖에서 책을 읽기에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읽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난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향할 곳은 한 곳뿐이다. 나는 기대감을 안고 계단을 오른다.
여전히 인적 드문 계단을 오르며 내가 떠올리는 것은 그의 얼굴이다. 오늘은 분명 옥상에 그가 있을 것이다. 날씨가 흐렸던 요 며칠 동안은 옥상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다. 옥상에서 책 읽기 좋아하는 그는 분명 언제나처럼 옥상에서 책을 읽고 있을 테지. 아직 초봄이라 야외에서 활동하기에 추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는 옥상에서 책을 읽기 위해 그 정도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남자다. 그곳에서 책을 읽기 위해 그 정도 추위쯤은 감수할 정도로 그곳이 매력적인 곳인지, 솔직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다만.
심호흡하고 나는 문고리를 잡는다. 나는 그에게서 졸업 전에는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잘 지키고 있었다. 아무튼, 말을 걸지는 않으니깐.
그를 보기 위해 내가 옥상을 오른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 부탁을 받았던 은퇴식 이후에도 나는 종종 그를 보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곤 하였다. 그때마다 그가 나를 보며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나에게 그 또한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지켜보는 나의 시선에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나는 그 모습도 꽤 귀엽다 생각하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린다. 문이 열리면 차가운 공기가 단숨에 밀려들어 온다. 늘 그가 있던 곳으로 눈을 돌리면 나의 기대대로 분명 그는 옥상에 있었다. 예상했듯이 책을 읽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유즈미 선배…?"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대답이 없다. 이것은 그와 내가 했던 약속의 위반이지만 약속을 했던 그가 못 들었으니 별로 상관없을 터다.
그가 움직이지 않아 걱정된 내가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보지만 그는 옥상 난간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것뿐이다. 얼굴을 가까이 대보면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책을 읽는 도중에 잠들었던 건지 왼손 끝에는 펼쳐진 책이 보인다.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감기 걸리실 텐데…"
걱정스레 내가 중얼거려 보지만 그가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는 그의 옆에 자리 잡아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자는 그를 보며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분명 '나'의 얼굴이지만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 나부낀다. 그것을 보며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 웃음소리도 낸다. 그는――― 아니, 치히로는 여전히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데서 저렇게 무방비한 채로 잠들다니 정말이지 태평하다 못해 한심한 남자다.
"그래도 귀엽지 않아?"
어느새 나(僕)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내(俺)가 말을 걸어온다. 귀엽기는 저 얼굴 대체 어디가. 어떻게 하면 저런 빈틈투성이인 얼굴이 귀여워 보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내가 따지면 저 녀석은 언제나처럼 웃어넘기겠지만.
(중략)
라쿠잔의 졸업식은 무사히 끝났다. 학생회장이자 재학생의 대표로 졸업식 송사를 낭송하면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떠나는 3학년들의 눈물로 얼룩진 졸업식 회장을 보고 있자니 절로 숙연해진다. 지금쯤 치히로도 학교를 떠나는 3학년으로서 울고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아는 치히로는 그런 것에 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아니었을 터다.
"마유즈미 선배, 지금쯤 옥상에 올라와 계실까."
내(俺)가 기대감을 안고 중얼거린다.
[전할 말이 있습니다. 오늘 졸업식이 끝나면 옥상으로 올라와 주시지 않으실래요?]
어제 밤 한 시간정도 끙끙거리다 겨우 보낸 메일의 내용이었다. 수신자는, 당연하지만 치히로다. 메일에 대한 답신은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俺)는 치히로가 옥상에 올 것이라 믿고 있었다.
치히로가 올 리가 없다. 어제 메일을 보냈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僕)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오늘을 기점으로 아카시 세이쥬로와 마유즈미 치히로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 웬만한 우연이 아니고서야 더 이상 만날 일도 없겠지. 그걸로 좋다. 나와 치히로의 사이는 여기까지인 것이다. 치히로 또한 이 이상 나와 관련 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내(僕)가 그렇게 말해도 나(俺)는 듣지 않았다. 쓸데없는 가능성에 너무 기대하지 말라 일렀지만 나(俺)는 믿고 싶다고 했다. 믿고 싶은 대상은 치히로인가? 내(僕)가 물었지만 나(俺)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나(俺)의 떨리는 마음이 나(僕)에게도 전해진다. 나(俺)는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평소에도 인적 드문 계단에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이라 재학생의 대부분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졸업생들 또한 이런 구석진 곳에 오기 보다는 식장이나 운동장에 모여 서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치히로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귀찮은 것은 싫어하는 남자니 식이 끝난 뒤 그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갔을 지도 모르겠다. 어디든 간에 지금 내가 오르는 옥상은 아닐 테지만.
조심스럽게 문의 손잡이를 잡으면 쇠붙이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나(俺)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혹여 문 너머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 문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건 자신의 심장소리 뿐이다.
눈을 감았다 뜨기를 몇 번, 심호흡을 하기를 몇 번, 손잡이를 잡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몇 번, 의미 없는 행동들을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나(俺)는 간신히 손잡이를 돌릴 수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면 끼익하고 녹슨 소리가 들린다. 눈이 부셔서 순간 눈이 찌푸려졌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누군가 난간에 기댄 채 서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설마… 설마……
"마유즈미 선배……."
탁, 하고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에 뒤를 돈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확신에 가까웠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치히로는 그곳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