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 세이쥬로도 결국 사람일 뿐이다. 이 당연한 명제를 마유즈미는 새삼 깨닫는다. 그 사실에 마유즈미는 묘한 안심감까지 든다. 이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긴 하다만. 누워있는 아카시의 이마에 손을 올리면 여전히 불덩이처럼 뜨겁다. 올려놨었던 수건은 이미 냉기를 잃고 미지근했다. 이건 새로 갈아야겠군. 마유즈미가 아카시의 땀을 닦아주며 혀를 끌끌 찼다.
"감사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선배에게도 면목 없네요. 거기다 선배한테 폐도 끼치고……."
"됐어. 딱히 바쁜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보다 의외긴 하네. 넌 이런 감기 같은 건 안 걸릴 줄 알았는데."
"하하… 설마요. 확실히 이렇게 심했던 건 드물기는 합니다만… 저도 감기 정도는 걸려요."
간신히 짜내듯 말하는 아카시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마유즈미에게 그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흔한 감기일 뿐이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다만 그 대상이 아카시 세이쥬로란 것을 제외하면 그랬다. 그 아카시 세이쥬로도 감기에는 걸리는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건만 마유즈미에게는 어째 현실성이 없다. 마유즈미안의 아카시는 감기에도 승리할 것만 같은 이미지였었다. 하지만 이로써 감기는 그 아카시님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마유즈미가 아카시를 간호하고 있는 이유는 동거인이기 때문이다. 아카시와는 올 초부터 같이 살고 있다. 마유즈미로서는 단순히 월세를 줄이기 위한 동거긴 하지만 동거인이 아픈 와중 나 몰라라 할 정도로 마유즈미는 매정한 인간은 못됐다. 아카시한테 말했듯 실제로 급한 일은 없기도 했다. 급했던 과제는 이미 제출한 다음이었으니깐. 과제를 하기 위해 최근 마유즈미가 밤을 새우던 시기에는 아카시가 마유즈미를 제법 챙겨줬었다. 어쩌면 이번 감기는 마유즈미에게 신경을 쓰다가 걸린 걸지도 모른단 생각에 마유즈미는 일말의 죄책감도 들었다.
"아무튼 쉬어."
죽이랑 약도 먹었고 땀도 닦아주었다. 이제 식은 수건만 갈아주면 한동안은 괜찮겠지. 마유즈미가 식은 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면 무언가 마유즈미의 팔을 당긴다. 아카시의 손이었다.
"…저기, 조금만 더 여기 계셔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카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마유즈미를 붙잡는 얼굴이 애처로워 보인다. 아카시를 안지 몇 년째 되어가지만 이렇게까지 약해 보이는 아카시를 본적이 있던가. 마유즈미의 기억에는 딱히 없었다. 그것이 별로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 잠깐만 있어 줄게."
"네, 감사합니다."
마유즈미가 다시 아카시의 곁에 자리 잡아 앉으면 아카시가 안심한 듯 눈을 감는다. 머지않아 아카시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지만 마유즈미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이 흐려진다. 머리가 무거워져 마유즈미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다. 기분 좋은 나른함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꺼풀이 무겁다. 이대로 자고 싶다고 멍한 머리로 생각한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마유즈미 선배… 괜찮아요…?"
"으음……."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탁자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아카시라고 인식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아카시가 내 자취방에 있는 거지. 아, 내가 들어오라고 했지. 떠오른 질문에 스스로 답을 냈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아카시의 얼굴은 붉다. 탁자 위의 빈 맥주캔들이 마유즈미의 눈에 들어왔다.
"도련님이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그거야… 선배가 많이 마시니깐……."
그랬던가. 아니, 내가 많이 마셔도 너는 마시면 안 되지. 대답하고 싶은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혀가 꼬여 말이 입안에 맴돌다 사라진다. 무거운 머리를 지탱할 수 없어져 마유즈미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정말… 괜찮아요…?"
아카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귀에 닿는다. 그렇지만 괜찮다는 말은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자신은 지금 괜찮은 건가?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원래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다. 어쩌다 동아리 모임에서 술자리가 있어도 늘 우롱차를 따로 시켰다. 그렇지만 오늘은 마시고 싶었다. 살다 보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날도 있다는 사실을 마유즈미는 이제야 실감한다. 마유즈미의 경우엔 오늘이 그 날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다. 눈앞의 맥주캔을 들으면 아직 술이 남아있다. 그대로 입에 가져가 모조리 털어 넣었다. 쓴 알콜이 식도를 타고 온몸에 퍼진다.
"내가 사람 마음을 잘 모른다고……."
마유즈미가 툭 중얼거린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들은 말이었다. 말을 했던 상대는 전 여자친구. 몇 시간 전까지는 전이란 글자가 붙어있지 않았다. 전 연인의 얼굴은 벌써 흐릿해져 기억 저편에 사라지고 있건만 헤어지기 직전에 했던 저 말만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맴돌고 있다.
마유즈미군은 정말 사람 마음은 잘 모르는구나.
헤어지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다. 마유즈미는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말은 사실이었으니깐.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어울리는 게 곤란했다. 혼자가 편했다. 그건 존재감이 없다는 이 특성 때문만은 아닐 터다. 아니, 이 특성 탓에 이런 기질이 된 걸까. 이제 와서 그런 인과관계는 아무래도 좋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정도는 마유즈미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마유즈미는 자기 자신을 좋아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전 여자친구와의 교제 기간은 3개월 남짓. 먼저 마유즈미에게 다가온 건 전 연인의 쪽이었다. 짧다면 짧은 연애 기간이지만 마유즈미로서는 첫 연애였다. 첫 연애에 마유즈미도 드물게 의욕적인 상태가 되어 마유즈미 딴엔 신경 쓴다고 썼것만 결국 끝은 이 모양이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끝이었던 만큼 미련이 남은 건 아니었지만 첫 연애의 끝이자 첫 실연이었다. 당장 괴로운 감정은 어쩔 수 없다. 이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겠지. 그러니 오늘만이다. 이렇게 술을 마시는 건.
목이 타는 갈증을 느껴 눈앞의 맥주캔을 든다. 바로 전에 모조리 털어 넣은 탓에 맥주잔은 가볍다. 아, 새로 맥주를 가져오지 않으면… 맥주캔을 넣어둔 냉장고로 가기 위해 비틀거리며 일어서면 다리에 힘이 풀려 마유즈미는 주저앉아버린다. 으, 다시 신음을 내며 일어서려고 하면 어느새 마유즈미에게 다가온 것인지 아카시가 일어서려는 마유즈미를 부축한다. 아카시는 여전히 마유즈미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많이 취하셨어요, 선배."
"아… 그런가…? 하지만 오늘은 취해도……"
"이만 주무시는 게 좋으실 거 같네요."
자기도 얼굴이 붉은 주제에 아카시가 마유즈미를 타이르듯 말한다. 이런 꼴을 보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마유즈미는 아카시에게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아카시를 부른 건 마유즈미가 아니다. 마침 술을 사 들고 자취방으로 향하는 도중 만난 아카시가 자신도 집에 오겠다기에 막지 않았을 뿐. 하긴 그거나 그거나 인가…
아카시의 말대로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감으면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지금은 자고 싶지 않아. 그런 마유즈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마유즈미를 부축한 아카시가 얼른 자라고 재촉하듯 마유즈미의 등을 쓸어내린다. 그렇게 되면 몰려오는 수마는 더는 막을 수 없다. 마유즈미는 결국 눈을 감는다. 의식이 끊기기 전 아카시가 무언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마유즈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마유즈미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아카시는 한숨을 내쉰다. 그러길래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왜 무리를 해서… 하긴 내 쪽도 마찬가지인가. 자신의 처지에 아카시가 자조한다. 하지만 아카시로서도 어쩔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실연을 당했다며 괴롭게 술을 마시고 있는 앞에서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겠지. 마유즈미가 술을 마시지 않고 못 배겼던 상황이었던 만큼 아카시도 그랬던 것뿐이다.
"…마유즈미 선배는 정말 사람 마음을 모르네요."
툭 던져본 말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아카시가 다시 짧게 한숨 쉰다. 그렇지만 이 괴로운 짝사랑도 머지않아 끝날지도 모른다. 이제 거리낄 것도 없으니깐. 가지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니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건 술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마유즈미의 뺨을 쓰다듬는 아카시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남의 사랑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는 게 좋다고. 쿠로코는 그 말을 절실히 통감했다. 애초에 별로 끼어들고 싶어 끼어든 건 아니다. 쿠로코의 입장에서는 본의 아니게 휘말린 재난과도 같았다. 정말이지 둘 다 이제 어른이니 알아서들 하면 좋으련만. 신간 도서를 책장에 끼워넣으며 쿠로코는 생각한다.
"어이, 구형. 사람 말 제대로 듣고 있는 거냐?"
"그 호칭으로 부르는 건 슬슬 그만둬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그래서 아카시군이랑 싸우고 어제저녁부터 말을 안 하고 있는 상태라고요?"
"그 녀석 사과 한마디를 안 하더라니깐."
마유즈미가 신경질적으로 책을 꽂아 넣으며 말한다. 그래서 오늘은 무엇 때문에 싸웠다고 했더라. 마유즈미가 읽는 라이트 노벨의 책 띠지를 아카시가 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다고 했던가. 아니면 게임의 이벤트 때문에 밤을 새는 마유즈미를 억지로 재우기 위해 한소리 했다던가. 싸움의 이유는 매번 바뀌었지만 비슷했다. 사실 쿠로코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쿠로코도 처음부터 이렇게 냉소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처음 둘이 싸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쿠로코도 꽤 걱정했다. 친구의 연애다. 거기에 쿠로코는 이러나저러나 마유즈미하고도 연이 있었다.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 아카시와 싸웠다는 마유즈미한테 고민 상담역을 자처했던 게 화근이었을까. 처음 몇 번은 쿠로코도 진지하게 들어주었으나 그것이 몇 번 반복되면 쿠로코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 커플의 싸움의 자신의 조언 따위는 필요 없다고. 쿠로코가 어떻게 말하든 결국 늘 결과는 같다. 자신의 역할 따위 무의미하다고 쿠로코가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싸움이 있었던가. 쿠로코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유즈미는 여전히 쿠로코에게 아카시에 대해 하소연할 때가 많았다. 그건 아마 쿠로코가 연애 사정을 말하기 적당한 상대기 때문일 터다. 마유즈미의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 아카시의 사정도 알고 있고 거기에 두 사람이 교제하는 걸 아는 사람은 마유즈미 주변에 흔치 않을 테니깐. 거기에 같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이니 마유즈미와는 싫어도 매일 얼굴을 맞대야 했다. 이유는 알고 있지만 쿠로코의 입장에서는 그저 난감할 뿐이다. 거기다 자신의 연인과 싸우고 나서 쿠로코에게 말을 걸어오는 건 마유즈미 뿐만이 아니다. 아카시 또한 마유즈미와 싸우고 나서 쿠로코에게 상담 요청을 해올 때가 흔했다. 마유즈미 쪽이 그저 아카시에 대한 불만을 쿠로코에게 쏟아낼 뿐이라면 이쪽은 마유즈미랑 화해하고 싶다며 쿠로코에게 해결책에 대한 조언을 요구하기 때문에 쿠로코의 입장에서는 더 질이 나쁘다. 그래봤자 자신의 조언대로 한 적은 없는 주제에. 진지하게 조언해주는 게 손해라는 걸 쿠로코는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그 녀석 정말이지, 매번 이렇게 사람을 우습게 알고…"
마유즈미가 진열대에 책을 던지듯이 놓는다. 저 커플이 싸우든 화해하든 알 바 아니지만 저러다 책이 상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쿠로코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마유즈미씨는 오늘도 아카시군이랑 말을 안 할 생각이신 건가요?"
"…그 녀석이 사과 안 하면."
여전히 툴툴거리며 마유즈미가 책을 이고 다른 쪽으로 가버린다. 이 꼴도 오래 보다 보면 언제쯤 화해할지 대강 예상이 가기 마련이다. 오늘은 저녁에 집에 가자마자 풀리겠군. 지금 이렇게 화내도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쿠로코 앞에서 아카시의 전화를 받을 테지. 전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커플의 애정행각을 목격하게 되는 건 덤이다. 쿠로코는 남모르게 혀를 끌끌 찬다. 슬슬 쿠로코쪽에서 아르바이트 처를 옮기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마유즈미씨,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벌써 그렇게 됐나? 들어가라, 구형."
"그러니깐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아니 됐습니다. 내일 봬요."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쿠로코는 마유즈미보다 일찍 끝나는 파트였다. 마무리 정리를 한 다음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쿠로코가 서점 밖을 나서면 서점 바로 근처에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아카시다.
"아카시군…?"
"아, 쿠로코……."
"여긴 어쩐일로… 아니, 괜한 질문을 했네요. 마유즈미씨 때문이겠죠. 두 분 또 싸웠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카시가 대답을 안 한 채로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이 모습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마유즈미와 싸운 아카시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저렇게 풀이 죽을 거라면 애초에 싸우지 않으면 될걸. 그건 또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마유즈미 선배는… 많이 화나 있어…?"
"네, 오늘도 아카시군이랑은 말을 안 하겠다고 하시던걸요."
"역시 그런가……."
설마 오늘도 화해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아카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경계하던 도중 쿠로코는 아카시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발견한다. 안에 든 물건까지는 알 수 없지만, 쇼핑백은 척 봐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아, 그런 건가. 쿠로코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지만 선물을 준비한 애인이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사과하면 바로 풀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럴까……?"
"화해하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안 하면 내가 더 귀찮아지니깐. 굳이 속마음을 덧붙이진 않았다. 역시 아르바이트 처를 옮기자. 쿠로코의 한마디에 기운을 차린 아카시를 뒤로한 채 집으로 걸어가며 쿠로코는 새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