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눌리는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답답함에 몸을 뒤척여 보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거야 원, 단단히 잡혀버렸군. 남의 일처럼 멀거니 생각했다. 뒤척이려던 그 움직임마저도 그 녀석에게는 거슬렸던 걸까. 어깨를 잡고 있는 팔에 체중이 실린다. 으읏… 느껴지는 통증에 마유즈미는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뱉었다.
위를 올려보면 그 녀석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뭐가 재밌는 거야, 망할 자식. 떠오른 불평을 속으로 삼킨다. 대신 혀를 작게 찼다. 작은 소리였지만 저 녀석에게는 분명 들렸을 테지. 얼굴을 한층 더 구기고 있으면 오른쪽 뺨에 무언가 닿는다. 방금 전까지 마유즈미를 침대에 파묻고 있던 손이다. 뺨에 닿은 손은 그대로 얼굴을 쓰다듬는다 싶더니 손가락 끝으로 뺨을 쿡쿡 찔러대기 시작한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가만 내버려두고 있으면 움직임은 멈출 줄 모른다. 뺨이 찔러지는 감각이 그리 기분 좋지는 않다.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후후, 미안미안. 치히로가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무심코."
귀엽기는. 키 180이 훌쩍 넘는 건장한 체격의 성인남자가 대체 어디가. 그리고 마왕님 주제에 그렇게 쉽게 사과하지 말라고.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불평은 이번에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다. 아까처럼 속으로 삼켰기 때문은 아니다. 자신을 내려 보던 전 농구부 후배―― 아카시 세이쥬로가 소리를 내기 전에 마유즈미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세간에서는 입맞춤, 혹은 키스라고 부른다지. 결국 같은 말이다만. 보통은 연인끼리 하는 행위다. 어디까지나 보통은 그렇다. 보통은 그렇다는 것은 어딘가에는 예외가 있다는 소리지. 아카시와 자신은 그 예외에 속한 관계일 것이다. 아마도.
혀가 얽히고 타액이 얽힌다. 질척이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간질간질한 감각을 참지 못하고 마유즈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지금 아카시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눈을 감고 있는 마유즈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잡힌 얼굴이 조금 아파왔다. 삼켜질 듯한 입맞춤, 혹은 키스라고 불리는 그것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순간동안 이어졌다 아카시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아카시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은 키스의 끝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시작의 신호기도 했다.
모자란 산소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눈을 뜨면 여전히 자신을 덮고 있는 아카시의 얼굴이 보였다. 상기된 뺨에 열에 녹은 눈동자. 바보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아카시를 보는 자신 또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카시 세이쥬로도 저런 얼굴을 하는 구나. 마유즈미는 새삼 놀란다. 저런 아카시의 얼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까지도 마유즈미는 몰랐다. 저 얼굴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아. 마유즈미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잠깐, 몇 번이라고? 이게 처음이 아닌가? 아니아니, 그전에 왜 난 지금 이 상황에 가만히 있는 거야?
"치히로……."
자신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들에 당황하고 있으면 뜨거운 숨결이 마유즈미의 이름을 부른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덩달아 자신의 숨결 또한 뜨거워지는 착각에 빠진다. 아니, 그건 착각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저도 모르게 내뱉어진 한숨은 분명 뜨거웠다. 방금 전 떠오른 의문 따윈 열기에 쉽사리 녹아버린다.
아카시의 얼굴이 다시 마유즈미에게로 다가온다. 또 입을 맞춰오려는 건가 싶어 질끈 눈을 감았지만 입술에 각오했던 충격은 오지 않는다. 대신 목에 무언가 닿았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면 목덜미에 달라붙은 아카시가 보인다. 쪼옥- 들으라는 듯이 과장된 입술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목을 덥석 문 아카시는 마유즈미의 목을 잘근 씹는다. 목덜미를 타고 전해지는 딱딱한 이의 감촉에 마유즈미의 몸은 굳는다.
(중략)
눈을 뜨면 침대 위였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이불 속부터 확인한다. 다행히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일은 없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유즈미는 그대로 쓰러져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또 그 꿈이다. 아카시의 꿈. 정확히는 아카시와……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마유즈미는 더 깊게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꿈에서 느껴졌던 통증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꿈의 기억은 바로 전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마유즈미의 꿈에 아카시가 나온다. 그것도 매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마유즈미의 인생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아카시 세이쥬로만큼 강렬한 인간은 없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그랬던 아카시니 만큼 어쩌다 꿈에 나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매일 꿈에 나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정한 인물이 매일 꿈에 나오는 건 흔한 일이던가? 아니 그럴리가 없지. 그런 이야기는 못들었다.
아카시가 매일 꿈에 나온 다해서 매일 똑같은 꿈을 꾸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농구공을 사이에 두고 졸업 전, 아직 주장과 부원이었을 때처럼 호흡을 맞출 때도 있고 평범하게 차를 마시며 얘기할 때도 있었다. 모두 아카시가 나오는 꿈이었지만 꿈의 내용은 다양했다. 그렇지만 꿈속의 아카시와 가장 많이 하는 건…… 대체로는 오늘 꿈같은 것이지.
"대체 왜……"
베개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고 마유즈미가 중얼거린다. 왜 아카시는 매일 마유즈미의 꿈에 나타나는 걸까.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몇 번을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카시와는 이런 저런 일이 많긴 했지만 덕분에 고등학교 마지막 1년은 나쁘지 않았다고 정리했던 후배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유즈미는 올해 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계절은 벌써 가을을 넘어 겨울의 문턱을 밟고 있다. 졸업한 이후로 아카시와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따로 연락한 적도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 연락한 적도 당연히 없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꿈은 무의식에 잠재된 욕구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라 했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언젠가 교양 수업에서 들었던 어느 심리학자의 주장이 떠올랐다. 그 주장을 마유즈미는 오늘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예상치도 못한 순간 갑자기 일어날 때가 있다. 라이트 노벨에서 나올법한 비일상은 언제든지 나타날 기회를 엿보고 있으며 갑작스레 등장한 그것은 때론 인생의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평생 인연이 없을 거 같았던 아카시 세이쥬로가 몸소 옥상으로 행차하셨던 일이라던가 말이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은 고등학교의 마지막 1년을 보낸 마유즈미는 이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 무엇을 갖다대도 그 순간에 비하면 평범했다. 그렇기에 마유즈미는 지금 이 순간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대학진학 문제로 교토에서 도쿄로 상경 후 혼자 사는 집에는 지금껏 가족 말고는 들인 적 없다. 그 가족 또한 처음 짐을 옮길 때를 제외하고는 온 적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 마유즈미를 제외한 타인이 들어와 있었다. 마유즈미가 들인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그 녀석은 자연스럽게 펼쳐놓은 작은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나를 보고도 그렇게 태연하다니 의외인걸. 분명 놀랄 거라 생각했어."
"여기 있는 게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놀랐을지도 모르겠다만 네가 내 상식 범위를 뛰어넘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 필시 이번에도 그런 일이겠지."
"호오,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었다니 영광인걸."
"딱히 칭찬은 아냐."
"그런가…. 아무튼 앉지그래. 차가 식겠어."
그제야 마유즈미는 상 위에 놓여있는 찻잔을 발견한다. 찻잔은 교토에서 이곳으로 이사 올 적에 필요 없다는 것을 어머니가 기어코 짐에 넣어둔 것이다. 혹시나 이 집을 찾아올 손님을 맞이할 때 필요할 거라는 게 이유였다. 물론 실제로 저 찻잔을 쓴 적은 없다. 차마 어머니한테 이 집에 손님이 오는 일은 없을 거라 말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가지고는 왔다지만 쓸 일이 없어 찻장 깊숙한 곳에 넣어버리고 잊고 있던 물건이었다. 저런 물건이 이 집에 있었는지 방금 생각났을 정도다. 녀석은 주인도 잊고 있던 찻잔을 꺼내 태연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이래서야 누가 집 주인인 줄 모르겠군. 작게 혀를 차면서도 마유즈미는 권하는 대로 순순히 앉았다. 녀석의 폭정에는 익숙했다.
찻잔 앞에 앉으면 녀석이 바로 정면에 보였다. 녀석은 교복 차림이었다. 몇 개월 전까지는 마유즈미도 매일 입던 교복이었다. 그 모습을 마유즈미는 찬찬히 살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후배다. 그렇지만 잊고 있던 적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마유즈미의 인생에서 눈앞에 있는 저 녀석, 아카시 세이쥬로만큼 마유즈미의 인생에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얼마 전 보았던 농구 잡지에서의 라쿠잔 고교 특집기사를 떠올린다. 그 기사에서는 현재 라쿠잔의 주장이자, 전 테이코의 주장인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도 담겨있었다. 잡지 속의 아카시는 만나지 않았던 고작 몇 개월간의 시간을 반영하듯 마지막으로 봤던 졸업식의 강단에서 송사를 낭독하던 아카시와 비교하면 제법 어른티가 났다. 사진이라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만 키도 조금 큰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눈 앞의 아카시는 사진 속의 모습보다 앳되어 보였다. 그 차이에 마유즈미는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마유즈미의 기억 속의 아카시는 눈앞에 있는 아카시였다. 위화감이 든다면 만난 지 못한 그 몇 개월 사이, 그새 조금 커버린 잡지 속의 아카시쪽이겠지. 그럼에도 마유즈미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녀석은 왜 지금 우리 집에 있는 걸까. 지금 이 시각이라면 아카시는 분명…….
"무슨 생각하는 거지, 치히로?"
불린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들었던 의문은 눈 녹듯 사라진다. 지금 이 시각이라면 아카시는 분명…… 뭐였지? 방금까지 하던 생각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듯한 기분에 적잖이 곤란함을 느끼고 있으면 아카시와 눈이 마주쳤다.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방금 느꼈던 곤란함 마저 사라져 버린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갑자기 이렇게 불쑥 찾아오고."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그저 치히로와 오래간만에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기고 싶었을 뿐이니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믿지 못하겠다면 유감인걸. 하지만 사실이야."
여전히 웃는 얼굴로 눈앞의 아카시는 찻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여유로운 티타임이라니, 당치도 않지. 아카시와 마주 앉아 이렇게 차를 마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마유즈미가 아직 라쿠잔 농구부의 부원이었고 아카시가 아직 마유즈미의 주장이었을 때, 이전에도 종종 이렇게 차를 옆에 두고 마주 앉아 있고는 했었다. 마유즈미에게 있어서 불편하기만 했던 그 시간들을 과연 티타임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를 모르겠다. 그것은 여유로운 티타임이라기 보다는 반성회라고 부르는 게 적절했다. 마유즈미는 이름이 무엇인지 짐작도 못 하겠는 향기 좋은 차(아카시가 준비했으니 값비싼 고급 차일 건 분명하다.)가 바로 옆에 놓여 있었지만 마유즈미가 그것에 입을 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동안의 플레이를 하나하나 지적하는 아카시를 앞에 두고 한가롭게 차나 마실 정도로 마유즈미는 낯 두껍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나쁘지만은 않았다 생각하는 1년이었지만 그렇다고 고단한 일이 없지는 않다. 비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아카시와의 티타임은 그런 일 중에 하나였다. 그때 아카시가 하는 말 중에서 틀린 말은 없다는 것이 마유즈미에게는 제일 기분 나쁜 점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난 이제 네 부원이 아니라고, 캡틴?"
"그건 확실히 그렇군."
그렇게 말한 아카시는 다시 찻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대었다. 한껏 빈정거리며 말했는데 깔끔하게 인정해버리면 오히려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뭐, 사실이긴 하지만. 입을 비쭉 내민 채 마유즈미도 눈앞에 있는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머금으면 달콤한 향이 입안에 퍼진다. 여전히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홍차 종류 중 하나같다. 마유즈미의 집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카시가 준비한 거겠지. 홍차보다는 커피 쪽이 더 좋은데. 떠오른 불만을 마유즈미는 홍차와 함께 삼킨다.
"차 맛은 어떻지?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이니 치히로의 입맛에 맞으면 좋겠는데."
"뭐어… 나쁘진 않아."
"나쁘진 않다, 인가… 그렇다면 다행인걸."
마유즈미의 대답을 들은 아카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고 아카시는 눈을 맞춰왔다. 그 시선을 받아넘기고 있으면 마유즈미는 더욱 알 수가 없어졌다. 설마하니 정말 차나 마시자고 이곳까지 온 건 아니겠지. 그 시선이 증거였다. 자신을 보는 아카시의 저 시선은 알고 있다. 무언가 할말이 있다는 뜻이다. 1년 가까이 아카시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알고 싶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그 할 말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슨 대단한 말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경험에 의하면 이대로 아카시는 마유즈미의 미스 플레이를 집어내거나 부족한 점이나 개선해야 할 점 같은걸 줄줄이 늘어놓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이제는 농구부원이 아닌 자신에게 아카시가 할 말이란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농구부원이 아닌 상태에서 아카시와 만나 얘기했던 건 딱 한 번, 결국 참석하지 않았던 라쿠잔의 은퇴식 날, 그 날 밖에 없다. 은퇴식이라… 그러고 보니 그 때는…
"다시 반말이라니 어떻게 된 거야. 저번에는 이제 부원과 주장이 아니라 평범한 선후배 사이라면서 존댓말을 썼잖아?"
저번, 이라 해도 이미 몇 개월 전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마유즈미에게는 바로 얼마 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아카시는 저런 이유를 갖다 대며 존대를 썼다. 아카시의 말은 분명 맞는 얘기였지만 갑작스레 바뀐 호칭에 느꼈던 당혹감을 기억한다. 이제 부원과 주장 사이가 아니라 평범한 선후배 사이라니.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는지는 몰랐는데.
그렇지만 눈앞의 아카시는 다시 반말을 썼다. 호칭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마유즈미에게 익숙한 쪽이라면 역시 지금의 아카시였지만 또다시 바뀐 호칭이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더 이상 네 부원이 아니란 말엔 그렇게 시원스럽게 인정해버렸던 주제에.
"확실히 전에 그런 말을 했었지. ……그럼, 역시 이쪽이 좋으신가요, 마유즈미 선배?"
지적하면 금세 말투와 호칭을 바꿨다. 아카시의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기분 나쁜 위화감에 마유즈미의 눈썹이 꿈틀 움직인다. 먼저 말투를 지적한 주제에 바로 말투를 바꿔오는 아카시가 마유즈미는 어쩐지 못마땅했다.
"…반말이라도 별로 상관은 없어. 아니, 오히려 기분 나쁘니깐 원래 하던 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데."
"후후, 치히로의 취향이 그쪽이라면 얼마든지 바꿔주지. 그럼 오늘 만은 치히로가 여전히 나의 부원이라 생각해도 되는 걸까."
"하? 왜 이야기가 그렇게… 아, 아니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
자기 좋을 대로 말하고 있는 주제에 뭐라는 거야. 내 취향이라니, 네 취향이 아니고? 거기에 나는 이미 예전에 은퇴한 몸에 라쿠잔 학생도 아니라고? 여전히 나의 부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따지고 싶은 건 많았지만 마유즈미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길 가망 없는 말싸움으로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여전히 나의 부원, 이라는 소리에 잠시 울렁거렸던 건 역시 기분 탓이겠지.
아카시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차를 홀짝이고, 이외에는 마유즈미의 얼굴을 가만히 볼 뿐이었다. 아카시가 입을 열지 않으면 마유즈미도 자연히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아카시와 달리 마유즈미는 아카시에게 할 얘기가 없었다. …아니 있었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 생각나지 않았다.
가라앉은 공기가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짓눌렀다. 가끔 아카시가 차를 홀짝이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시간이 짧았는지 길었는지 마유즈미로서는 알 수 없다. 마유즈미와 아카시, 두 사람을 제외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에 잠시 빠졌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으니깐.
"이런, 벌써 차가 식어버렸는걸."
차를 홀짝이던 아카시는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에 마유즈미는 잠시 넋놓고 있던 정신을 가다듬는다. 차가 식었다는 것의 의미를, 마유즈미는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떠올리는 순간 분명히 이 시간은 무너진다.
치히로. 아카시의 목소리가 마유즈미를 부른다. 아쉬운 듯이 바라보던 찻잔에서 눈을 떼고 마유즈미와 눈을 맞춰온 아카시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마유즈미는 입술을 깨문다.
"1년 동안, 수고했어."
뜸 들이더니 하고 싶었던 말이 겨우 저거였나. 뭐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언젠가 아카시한테 들었던 말과 똑같았다. 그렇지만 처음들은 듯 생소했다. 그건 그때와는 말투가 다르기 때문일까. 그때는 내가 무슨 대답을 했더라. 마유즈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지만 똑같은 대답을 할 생각은 없었다. 눈앞의 아카시에게는 그 때와는 다른 대답을 들려주고 싶었다.
"너도 수고 많았어, 주장."
그렇게 말하면 아카시의 눈은 일순 크게 떠졌지만 이내 조용히 웃었다. 웃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라고, 마유즈미는 생각했다.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있으면 다하고 가. 이대로 못 들으면 찜찜할 거 같으니깐."
"유감이지만 하고 싶은 말은 정말 이게 다야. …아니, 아직 하나 더 있군."
찻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홍차는 아카시가 말한 대로 식어있었다. 희미한 열기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것도 곧 사라져 버릴 테지. 달콤하기만 한 줄 알았던 홍차는 식어버리니 뒷맛이 씁쓸했다. 입안에 퍼지는 씁쓸함에 마유즈미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마유즈미 스스로도 몰랐다.
그나저나 '고마워'라니, 내가 아는 아카시한테는 안 어울리는 말인걸. 그런 생각을 하며 마유즈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상하는 의식에 마유즈미는 눈이 떠졌다. 꿈을 꿨다. 꿈의 내용은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운 누군가와 얘기 했던 것 같기도, 아닌 거 같기도 하다.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은 꿈에서 남은 건 까닭 모를 애틋한 심정 뿐이다.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이런 기분이 드는걸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가볍게 느껴지는 두통에 이마를 누르고 고개를 돌리면 전원이 켜진 노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노트북 화면에는 농구 경기가 라이브로 중계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길거리 농구팀인 재버워크와 즉석으로 결성된 일본의 보팔소드 경기였다. 그러고보니 그랬지. 볼지 말지를 몇 번이고 고민한 끝에 노트북에 중계화면을 연결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1Q까지만 보고 그만 잠들은 모양이었다. 그 치열했을 경기를 보면서도 잠이 들다니 팔자도 좋지. 마유즈미는 자조했다. 보아하니 경기는 방금 전 끝난 거 같다. 이긴 팀은 보팔소드였다.
이겼구나……… 후우,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혼자 있는 집이니 아무도 볼 리 없는데 어째 머쓱해져 헛기침을 했다. 그러는 사이 화면은 이긴 팀의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돌아가며 비추고 있었다. 화면에 집중해 기다리고 있으면 머지 않아 마유즈미에게 익숙한 붉은 머리가 보였다.
"아카시……."
오랜만에 소리내어 불러본 후배의 이름이지만 닿을 리가 없었다. 화면 너머의 아카시가 마유즈미는 멀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