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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유즈미에게 반해버린 오레시랑 그걸 지켜보는 보쿠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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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이 얼마 안 남았다. 이 시기가 되면 학생회는 분주해진다. 1년에 한 번 있는 학교의 큰 행사다. 여러 가지 준비할 것이 많았다. 덕분에 학생회장인 나 또한 평소보다 바빠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졸업식 진행에 대한 서류를 읽다 나는 창문을 바라본다. 창문을 통해 학생회장실에 햇빛이 쏟아 들어온다. 요 며칠 우중충하게 흐렸던 것을 생각하면 오래간만에 좋은 날씨다. 이 날씨라면 밖에서 책을 읽기에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읽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난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향할 곳은 한 곳뿐이다. 나는 기대감을 안고 계단을 오른다.
여전히 인적 드문 계단을 오르며 내가 떠올리는 것은 그의 얼굴이다. 오늘은 분명 옥상에 그가 있을 것이다. 날씨가 흐렸던 요 며칠 동안은 옥상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다. 옥상에서 책 읽기 좋아하는 그는 분명 언제나처럼 옥상에서 책을 읽고 있을 테지. 아직 초봄이라 야외에서 활동하기에 추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는 옥상에서 책을 읽기 위해 그 정도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남자다. 그곳에서 책을 읽기 위해 그 정도 추위쯤은 감수할 정도로 그곳이 매력적인 곳인지, 솔직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다만.
심호흡하고 나는 문고리를 잡는다. 나는 그에게서 졸업 전에는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잘 지키고 있었다. 아무튼, 말을 걸지는 않으니깐.
그를 보기 위해 내가 옥상을 오른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 부탁을 받았던 은퇴식 이후에도 나는 종종 그를 보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곤 하였다. 그때마다 그가 나를 보며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나에게 그 또한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지켜보는 나의 시선에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나는 그 모습도 꽤 귀엽다 생각하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린다. 문이 열리면 차가운 공기가 단숨에 밀려들어 온다. 늘 그가 있던 곳으로 눈을 돌리면 나의 기대대로 분명 그는 옥상에 있었다. 예상했듯이 책을 읽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유즈미 선배…?"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대답이 없다. 이것은 그와 내가 했던 약속의 위반이지만 약속을 했던 그가 못 들었으니 별로 상관없을 터다.
그가 움직이지 않아 걱정된 내가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보지만 그는 옥상 난간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것뿐이다. 얼굴을 가까이 대보면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책을 읽는 도중에 잠들었던 건지 왼손 끝에는 펼쳐진 책이 보인다.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감기 걸리실 텐데…"
걱정스레 내가 중얼거려 보지만 그가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는 그의 옆에 자리 잡아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자는 그를 보며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분명 '나'의 얼굴이지만 별로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 나부낀다. 그것을 보며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 웃음소리도 낸다. 그는――― 아니, 치히로는 여전히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데서 저렇게 무방비한 채로 잠들다니 정말이지 태평하다 못해 한심한 남자다.
"그래도 귀엽지 않아?"
어느새 나(僕)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내(俺)가 말을 걸어온다. 귀엽기는 저 얼굴 대체 어디가. 어떻게 하면 저런 빈틈투성이인 얼굴이 귀여워 보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내가 따지면 저 녀석은 언제나처럼 웃어넘기겠지만.
(중략)
라쿠잔의 졸업식은 무사히 끝났다. 학생회장이자 재학생의 대표로 졸업식 송사를 낭송하면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었다.
떠나는 3학년들의 눈물로 얼룩진 졸업식 회장을 보고 있자니 절로 숙연해진다. 지금쯤 치히로도 학교를 떠나는 3학년으로서 울고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아는 치히로는 그런 것에 눈물을 흘리는 남자는 아니었을 터다.
"마유즈미 선배, 지금쯤 옥상에 올라와 계실까."
내(俺)가 기대감을 안고 중얼거린다.
[전할 말이 있습니다. 오늘 졸업식이 끝나면 옥상으로 올라와 주시지 않으실래요?]
어제 밤 한 시간정도 끙끙거리다 겨우 보낸 메일의 내용이었다. 수신자는, 당연하지만 치히로다. 메일에 대한 답신은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俺)는 치히로가 옥상에 올 것이라 믿고 있었다.
치히로가 올 리가 없다. 어제 메일을 보냈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僕)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오늘을 기점으로 아카시 세이쥬로와 마유즈미 치히로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 웬만한 우연이 아니고서야 더 이상 만날 일도 없겠지. 그걸로 좋다. 나와 치히로의 사이는 여기까지인 것이다. 치히로 또한 이 이상 나와 관련 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내(僕)가 그렇게 말해도 나(俺)는 듣지 않았다. 쓸데없는 가능성에 너무 기대하지 말라 일렀지만 나(俺)는 믿고 싶다고 했다. 믿고 싶은 대상은 치히로인가? 내(僕)가 물었지만 나(俺)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나(俺)의 떨리는 마음이 나(僕)에게도 전해진다. 나(俺)는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평소에도 인적 드문 계단에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이라 재학생의 대부분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졸업생들 또한 이런 구석진 곳에 오기 보다는 식장이나 운동장에 모여 서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치히로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귀찮은 것은 싫어하는 남자니 식이 끝난 뒤 그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갔을 지도 모르겠다. 어디든 간에 지금 내가 오르는 옥상은 아닐 테지만.
조심스럽게 문의 손잡이를 잡으면 쇠붙이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나(俺)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혹여 문 너머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어 문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건 자신의 심장소리 뿐이다.
눈을 감았다 뜨기를 몇 번, 심호흡을 하기를 몇 번, 손잡이를 잡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몇 번, 의미 없는 행동들을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나(俺)는 간신히 손잡이를 돌릴 수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면 끼익하고 녹슨 소리가 들린다. 눈이 부셔서 순간 눈이 찌푸려졌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누군가 난간에 기댄 채 서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설마… 설마……
"마유즈미 선배……."
탁, 하고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목소리에 뒤를 돈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확신에 가까웠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치히로는 그곳에 서있었다.
버저가 울리고 시합의 끝을 알렸다. 관중석의 환호성 소리가 귀를 찌른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점수판을 바라보면 압도적인 숫자로 이긴 것은 라쿠잔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아직 지역 예선의 초반, 이번 대회의 우승후보인 라쿠잔의 경기다. 그에 비해 상대는 무명의 고등학교. 승리의 행방은 시합이 시작되기 전부터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라쿠잔의 승리를 확신했고 그 확신은 방금 전 현실이 되었다.
그 당연한 승리조차도 마유즈미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경기장의 조명, 관중석의 환호성 소리, 시합 직후의 열기, 왠지 모를 이 두근거림도 마유즈미에게는 처음이었다. 왼손을 올려 천천히 쥐었다 펴본다. 방금 전까지 패스했던 손이었다. 라쿠잔의 승리를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 손으로 패스했던 것도 처음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유즈미의 패스가 실제로 라쿠잔의 승리로 이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마유즈미는 마른 침을 삼킨다.
"치히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유즈미를 불러 마유즈미는 정신을 차린다. 이 코트 위에서 마유즈미를 치히로라고 부를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아카시였다. 돌아보면 날카로운 눈동자가 마유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동자와 마주하면 뜨거웠던 머리는 단번에 차갑게 식는다. 움찔하는 마유즈미를 보는 아카시의 눈이 가늘어진다. 아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아카시는 뒤를 돌아 정렬하기 위해 심판의 앞으로 향한다. 그 뒤를 마유즈미도 곧 뒤따랐다.
"이 정도에 승리에 흥분하면 곤란해, 치히로."
아카시의 목소리가 빈 부실에 울린다. 학교로 돌아와 다들 해산하는 가운데 마유즈미만을 남겨서 다짜고짜 한다는 소리가 저거다. 흥분하긴 누가. 바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경기장에서부터 울리던 심장은 여전히 쿵쾅대고 있다. 부실의 의자에 앉아있는 마유즈미를 아카시가 내려보고 있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 마유즈미는 고개를 돌려 피한다. 분명 고개를 돌렸는데도 옆이 따갑게 느껴졌다.
"…처음이니깐 어쩔 수 없잖아."
따가운 시선에 못이긴 마유즈미가 고개를 숙이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린다. 무엇이 처음인지는 얘기하지 않는다. 농구를 시작한 이래로 공식전의 선수로 나온 것도, 그 공식전에서 이겼던 것도 모두 처음이었고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스스로 말하기엔 비참한 기분이 든다. 마유즈미는 더 말하지 않고 입을 꾸욱 다문다.
"라쿠잔의 선수라면 좀 더 승리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앞으로의 승리가 많이 남아있으니깐 말이지. 벌써 이렇게 들떴다가는 앞으로의 승리에 영향이 갈 수도 있어."
"…그러시겠지."
마치 앞으로의 승리가 당연하다는 투다. 아마 그 의미가 맞겠지만. 저 도련님은 오늘의 승리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매일 당연하게 승리를 몸소 체험하시고 있을 테니깐. 자신과는 달랐다. 새삼 느껴지는 격차에 마유즈미는 미간을 찌푸린다. 아카시의 말대로 이 정도 승리에 기뻐하고 있는 자신이 어쩐지 한심해 진다.
"오늘 플레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얘기를 하려고 남긴거면 이만 돌아가도 되겠지? 결론이 나는 문제도 아니니깐 말야."
이 이상 아카시와 얘기하고 있으면 자신이 더 비참해질 뿐이다. 이만 돌아가고 싶었다. 마유즈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카시가 갑자기 얼굴을 붙잡아 돌리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터였다.
얼굴이 끌어당겨져 위를 향했다. 마유즈미가 눈을 크게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아카시의 눈에 비친 겁먹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대로 얼어 반응하지도 못하고 있으면 입술에 무언가 닿는다. 그것이 눈앞의 아카시의 입술이라고 마유즈미가 인식한 것은 입을 맞춘 채로 아카시의 입술이 달싹였을 때였다.
방금 전 상황에서 이렇게 흘러갈 만한 거리가 있었던가? 아니다. 바로 전에 자신과 아카시 사이에 있는 것은 차가운 기류였을 뿐 로맨스 영화의 그 특유의 달콤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비현실적이라고 불리는 라노벨에서도 이런 식의 뜬금없는 입맞춤은 본 적 없다. 우리가 입을 맞출만한 사이였던가? 이거야말로 전혀 아니었다. 자신과 아카시는 그저 같은 부의 주장과 부원일 뿐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비록 자신과 아카시의 사이가 일반적인 주장과 부원은 아니었다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그것보다…
이 상황이 어떻게 벌어졌지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아카시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에 겹쳐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유즈미는 눈앞의 아카시를 있는 힘껏 민다. 전력으로 내동댕이칠 기세로 밀었는데 얼굴이 떨어졌을 뿐 아카시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분했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것이 그것이 아니었다.
아카시의 얼굴이 떨어지자마자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조금 전까지 겹쳐지던 입술의 감촉이 생생했다. 이거 설마 첫키…… 아니 그건 지금 생각하지 말자. 조금 울고 싶은 기분으로 마유즈미는 입술을 살짝 깨문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어때, 치히로. 지금도 두근거려?"
"뭐…?"
벌떡 일어나서 여차하면 한 대 때릴 기세로 화냈는데 돌아오는 대답에 마유즈미는 말문이 막힌다. 두근거리냐니. 이런 상황에. 설마.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까보다 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이건 갑작스런 상황에 심장이 놀란 거니깐. 공포영화를 봤을 때 심박 수가 올라가는 거랑 마찬가지야. 마유즈미는 애써 생각을 돌린다. 그러는 사이 아카시가 다시 마유즈미의 얼굴을 잡는다. 아카시가 손가락이 마유즈미의 뺨에 닿으면 마유즈미는 얼어버린다. 아까와 똑같은 상황인데 뿌리칠 수 없었다.
"기억해 치히로. 지금 네가 두근거리는 것은 나 때문이니깐."
"뭐라고…?"
"승리가 너에게 자극적인 것이라면 더 큰 자극을 주면 돼. 그렇다면 승리에 대한 감각은 무뎌질 테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 같은 이론이라고, 마유즈미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합에서 이겼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근거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건… 반박을 하기 위해 마유즈미의 입술이 달싹인다. 그렇지만 마유즈미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아카시의 입술이 다시 마유즈미의 입술 위로 포개져 마유즈미의 반론은 조용히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