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마유즈미는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다. 마유즈미와 살고 있는 것도 햇수로 몇 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드물었다. 지금도 마유즈미는 책을 펼쳐놓은 채 멀거니 책 페이지만을 보고 있었다. 책을 넘기는 손은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 저건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겠지.
"열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어……?"
지켜보던 아카시가 보다못해 불쑥 한마디를 꺼내면 마유즈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마유즈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마유즈미의 이마에 아카시가 자신의 손을 올린다. 미열이긴 하지만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도가 뜨겁다.
"미열이긴 하지만 열이 있긴 한 거 같네요."
"그러고 보니 요새 몸이 꽤 나른했던 거 같기도 하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됐어, 이 정도는 쉬면 나아."
아카시가 걱정스레 제안하면 마유즈미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카시의 눈이 못마땅한 듯이 가늘어진다.
"병원은 제때 가는 게 좋아요."
"정말 괜찮다니깐, 이 정도는."
"아무리 그래도 가보시는 게 좋아요. 작은 병이라고 방심했다가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저희 어머니도 처음에는 작은 병이었는데……."
"……."
어머니의 얘기를 꺼내면 아카시는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 모습을 보는 마유즈미는 곤란해진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갈 수도 없었다. 포기한 듯 마유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그래도 지금은 밤이니깐… 내일도 몸이 나른하고 열이 있다 싶으면 갈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병원부터 가보죠. 저도 내일은 휴가 낼 테니까."
"벌써? 나 아직 이 책 다 못 읽었는데."
"쉬는 게 먼저예요."
아카시는 단호하다. 시계를 보면 시침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밤이긴 하지만 잠들기도 이른 시간이다. 그렇지만 저렇게 완강히 나오는 아카시는 마유즈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 몸 상태로 책을 읽어봤자 온전히 집중하기도 힘들긴 하겠지. 마유즈미는 아쉬운 내색을 하며 읽던 책을 덮었다.
"――마유즈미 씨, 몇 가지 검사를 받아보셨으면 하는데요."
"네…?"
마유즈미는 자신의 증상이 흔히 지나가는 감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병원을 찾아가면 의사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나왔다. 검사라니. 그럼 평범한 감기가 아니란 건가? 마유즈미는 당황스러웠다.
"저, 무언가 큰 병이 의심되는 건가요?"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할 거 같군요."
마유즈미를 따라 같이 병원에 온 아카시가 혼란스러워하는 마유즈미 대신 물어보면 의사는 난색을 보일 뿐 제대로 된 답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마유즈미는 더욱 불안해진다. 진료실을 나오면 아카시가 말없이 손을 잡아주었다. 그 온기에 마유즈미는 조금 안심한다.
이후 마유즈미는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무엇을 위한 검사인지 검사를 하는 의사나 간호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다들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말하기 어렵다는 소리뿐이었다. 검사를 마칠 때까지도 아카시가 마유즈미의 옆에 있어 주었다. 그 존재에 안심이 되면서도 마유즈미는 초조하게 아카시와 함께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마유즈미 치히로씨는 현재 임신 중이십니다."
"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검사 결과였건만 의사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잘 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임신이라고 했었지. 임신? 누가? 내가? 스턴이 걸린 듯 마유즈미는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마유즈미는 분명 남자였다. 임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방금 의사의 발언은 그런 마유즈미의 상식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역시 무언가 착오가 있던 게 아닐까. 아니면 설마 아카시와 병원이 짠 몰래카메라라도 되는 건가? 옆에 있는 아카시쪽을 돌아보면 아카시도 놀란 건 마찬가지인 듯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저는 남자인데, 임신할 리가……."
"…놀라시는 것도 이해합니다만, 진정하고 들어주세요."
마유즈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의사가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나간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극히 희귀한 사례긴 하나 남성이 임신하는 사례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마유즈미는 그 희귀한 사례 중 하나라는 거 같았다. 아이의 아버지로 누군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냐고 의사가 물었을 때 마유즈미는 옆에 있는 아카시를 보는 거밖에 할 수 없었다. 별다르게 짐작 가는 사람은 없다. 아카시 뿐이다. 그러니 아마 아카시의 아이겠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마유즈미에게 의사는 조심스럽게 낙태할 것을 권유했다. 남성 임신의 사례는 극히 드물고, 아이나 산모나 잘못될 확률이 더 크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애를 지우는 수술을 위해서는 아이의 아버지, 즉 보호자의 동의도 같이 필요하다고 했다. 상태를 보아 아기는 3주째에 접어들었다는 거 같다. 그 모든 얘기를 마유즈미는 남의 일처럼 듣고 있었다. 의사의 말을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지만, 현실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며 의사는 마유즈미와 아카시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중에 또 병원에 오라는 말과 함께. 그 뒤로 집으로 어떻게 왔는지 마유즈미는 기억하지 못한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집으로 들어왔다. 얼빠진 얼굴을 한 건 아카시 쪽도 마찬가지다.
집에 오자마자 마유즈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병원에서 들었던 말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임신이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마유즈미는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저기, 마유즈미 선배……."
"……."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 있으면 마유즈미를 향해 아카시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마유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카시는 그다지 잘못한 게 없다. 그건 알고 있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카시 또한 마유즈미 만큼이나 혼란스럽긴 하겠지. 알고 있지만 남을 생각할 여유가 지금의 마유즈미에게는 없었다.
"저는…선배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깐요."
무엇을, 이라는 얘기는 없다. 그렇지만 아카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마유즈미는 알 수 있었다. 의사도 위험하니 지울 것을 권고했다. 아카시는 마유즈미의 뜻대로 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유즈미는 과연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마유즈미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위험부담을 생각하면 의사 말대로 따르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마유즈미는 다시 자신의 배 위로 손을 얹었다. 역시 이곳에 아카시와 자신의 아이가 있다니. 마유즈미는 믿을 수 없다. 지금도 모두가 짜고 자신을 속이려는 거 같았다. 자신의 몸인데도 병원에 갔다 온 뒤로는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이곳에 아카시의 아이가 있다면… 마유즈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낳을게."
병원에 갔다 온 뒤로 하루 꼬박 마유즈미는 고민했다. 고민하고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카시와 자신의 아이다. 마유즈미는 없애고 싶지 않았다. 위험부담이 있는 것도 알고 각오도 해야 했지만 아카시 세이쥬로의 아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고마워요."
마유즈미의 결심에 아카시는 긴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손을 잡아준 아카시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거 같아서, 달래듯이 마유즈미가 아카시를 안아주었다.
2.
마유즈미는 요즘 들어 부쩍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있을 때가 전보다 많아졌다. 잠도 갑작스레 많아져 정신 차려보면 시도 때도 없이 잠들어 있을 때가 많았다. 최근 아카시가 들어오는 걸 마유즈미는 본 기억이 없다. 아카시가 올 때까지도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잠들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잠깐 혼자 바람을 쐬러 공원에 나갔다가 공원에서 반나절이나 잠든 적도 있었다. 그때는 아카시가 꽤 당황했지. 이 급격한 몸의 변화는 아마 배 속에 있는 존재 때문일 터다. 병원에서 갑자기 잠이 많아질 수도 있다고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 마유즈미가 프리랜서라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인 걸까. 하지만 연재하는 소설도 지금으로서는 잠시 휴재해야 할지도 몰랐다. 실제로 휴재를 한다면 이유는 적당히 둘러 말하겠지만 휴재 이유로 작가의 임신이 발표되는 상상을 하고 마유즈미는 쓴웃음을 짓는다.
"오래간만이네요, 마유즈미씨."
"…깜작이야. 너 그렇게 사람 놀래키면서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내가 늘 말하지 않았냐."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건 마유즈미씨도 잘 아시지 않나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하겠습니다."
쿠로코가 마유즈미의 배를 흘끗 보고 자리에 앉는다. 오래간만의 쿠로코와의 만남이었다. 장르는 다르지만 같은 작가라는 이유로 쿠로코와는 이렇게 종종 만나고는 했다. 작가들끼리만 할 수 있는 한탄이란 것도 있었다. 이렇게 쿠로코와 직접 만난 건 병원에서 임신이란 걸 진단받고 처음이다.
"마유즈미씨는 이미 주문하셨나요? 저는 항상 먹던 바닐라 라떼를 주문하려고 하는데."
"아니, 아직 주문 안 했어. 나도 늘 먹던 에스프레소로… 아니, 오늘은 따뜻한 우유로……."
임신했을 때 먹으면 안 되는 음식 목록 중에는 분명 커피도 있었다. 아이에게 카페인은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깐. 임신한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 일절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았건만. 또 습관적으로 말할 뻔했다. 마유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시군에게서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 마유즈미씨의 일……."
쿠로코가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냈지만, 말끝은 흐린다. 슬슬 마유즈미로서는 익숙해지는 단어긴 하지만 밖에서 말하기는 남사스러운 단어긴 하지. 주문으로 나온 따뜻한 우유를 입에 대며 마유즈미는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그 녀석 신나게 말하고 다녔나보구만."
"부정은 못 하겠네요. 저희끼리 모인 라인 방에서 아카시군이 그렇게 호들갑 떠는 건 처음 봤거든요."
"나 참… 이게 동네방네 떠들어서 좋은 일도 아니고."
"그렇기에 더 저희에게 말한 거 아닐까요.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은 아무래도 한정되어있으니깐요."
쿠로코가 즐겁다는 듯 말한다. 사실 마유즈미는 임신한 사실을 아직 아카시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다. 남성이 임신했다는, 절대 평범하지 않은 일을 어떻게 얘기 꺼내야 할지 마유즈미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부모님에게는 얘기해야겠지. 부모님 생각을 하면 다시금 막막해진다. 집안의 외동아들이 남자 애인을 사귀다 못해 그 애인의 아이까지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면 부모님은 어떻게 반응할지. 기절은 하시지 않으면 좋겠는데. 마유즈미가 넌지시 생각한다.
"저희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놀랐지만, 지금은 아카시군이니깐- 하고 다들 납득하고 있어요."
"그거 웃으라고 하는 소리야?"
마유즈미가 쿠로코를 째릿하고 쳐다보면 쿠로코는 그저 웃을 뿐이다. 이런 데서 아카시랑 친구라는 티를. 역시 테이코 출신들은 자기랑 안 맞는다고 마유즈미는 새삼 생각한다. 하지만 마유즈미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극히 희귀하다는 확률을 뚫고 왜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한때는 꽤 고민한 적도 있지만 아카시 세이쥬로니깐, 하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 앞에서 확률이 무의미했다.
"쓰시던 글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휴재할까도 생각 중이야. 그치만 당장은 계속 쓰고 싶으니까 조금 더 버텨 보려고."
"그러신가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마유즈미씨가 무리하면 저희 라인 방의 평화가 깨지거든요."
쿠로코가 바닐라 라떼를 빨대로 빨아 먹으면서 말한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아카시…. 마유즈미는 조금 머리가 아파졌다.
"…예쁜 아이가 태어나면 좋겠네요."
빨대에서 입을 뗀 쿠로코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한다. 이 말을 아카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듣는 건 처음이다. 마유즈미에게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온다.
"…그러면 좋겠네."
아카시와 자신의 아이. 아직 실감은 안 나지만. 마유즈미도 역시 조용히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3.
속이 매스거워 죽겠다. 최근 몇 주간 마유즈미는 음식을 제대로 먹은 적이 별로 없다. 마유즈미는 음식 냄새에 그렇게 민감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요 몇 주간은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와 기껏 아카시가 차려준 상을 박차고 나올 때가 벌써 몇 번씩이나 있었다. 음식뿐만이 아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사람의 체취에도 민감해져 마유즈미는 되도록 집에서만 있었다.
마유즈미가 헛구역질을 할 때면 아카시가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든 마유즈미를 안정시켜주려고 했지만 그렇대도 아카시가 딱히 해줄 것은 없었다. 그래도 정말 상태가 심각할 때면 아카시를 껴안았다. 아카시를 껴안으면 심적으로 안정이 돼서인지 매슥거림도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체취도 마유즈미에게는 고역이었지만 아카시의 체취는 예외다. 역시 자기 부모는 알아보는 건가. 매슥거림이 심해져 아카시한테 껴안길 때면 멍하니 마유즈미는 생각한다.
이렇게 음식을 거의 입에 못 댈 때가 있는가 하면 갑자기 어떤 특정한 음식이 먹고 싶어서 못 참겠는 때가 있었다. 대부분 마유즈미가 원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들이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생겼을 때 새벽에라도 넌지시 중얼거리면 아카시가 어떻게든 구해오고는 했다. 그렇게 먹고 싶다가도 막상 아카시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구해오면 다시 헛구역질이 올라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카시한테 미안해서 마유즈미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아카시가 딱히 힘들다는 내색을 한 적은 없었다. 그게 더 미안해서 마유즈미는 되도록 무엇이 먹고 싶다는 얘기는 아카시 앞에서는 자제하려고 했지만 그러고도 몇 번이나 마유즈미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구하려고 아카시가 새벽에 나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태명은 역시 링고가 좋지 않을까……."
손에 든 사과를 한 입 깨물며 마유즈미가 툭 중얼거렸다. 웬만한 음식은 매슥거려서 입에도 대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이상하게 사과만은 괜찮았다. 링고라고 하면 마유즈미가 한때 즐겨 읽던 라이트노벨의 히로인 이름이다. 마유즈미는 링고보다는 카구야 파였지만 이렇게 사과를 좋아하는 걸 보면 괜찮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태명이 아닌 실제 쓰일 이름은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이렇게 사과를 좋아하는 걸 보면 괜찮은 이름일지도 모르겠네요."
같이 사과를 먹던 아카시가 옆에서 끄덕이며 마유즈미의 말에 동의한다. 요 몇 주간 마유즈미도 그랬지만 마유즈미 옆에 있는 아카시도 꽤나 고생했다. 그걸 생각하면 아카시에게 조금 미안해지다가도 마유즈미가 이렇게 된 원인에 아카시도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죄책감이 날아가곤 했다.
아무튼 맞는 음식이 하나라도 있다는 던 다행인 일이었다. 아카시가 사 온 사과 한 상자를 보며 마유즈미는 내심 안도한다. 그렇다 해도 이 시기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설마 남은 몇 개월 동안 내내 지속되는 건 아니겠지. 아득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선택했던 결과다. 선택할 땐 설마 이런 거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마유즈미는 습관처럼 자신의 배를 문지른다. 기분 탓일까 배가 조금 불러온 거 같기도 하다.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했다. 초음파 검사로 보이는 마유즈미 안의 그 존재는 이제 마유즈미도 알아볼 정도로 확연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유즈미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러다가 출산할 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는 건 아닐까. 남 이야기하듯 마유즈미가 넌지시 생각한다.
초음파 검사를 할 땐 아카시도 옆에 있었다. 이전까지 아기라는 존재에 대해 실감이 나지 않았던 건 아카시도 마찬가지였을까. 병원에서부터 집에 오기까지 조금 얼빠진 얼굴을 했던 아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임신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집으로 오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카시가 마유즈미를 껴안았다. 이번에 아카시는 울 거 같은 얼굴이 아닌 정말로 울고 있었다.
"어떡하죠, 저. 부모가 될 수 있을까요……."
괴롭게 쥐어짜듯 아카시가 말한다. 마유즈미를 껴안는 아카시의 어깨가 떨렸다. 마유즈미는 아무 말 없이 아카시의 어깨를 껴안았다. 부모라. 아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래로 생각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이제껏 아카시나 마유즈미가 직접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저한테 항상 완벽을 요구했어요. 만약 아버지가 저한테 그랬듯 저도 그 아이한테 그러면……."
아카시의 어린 시절 얘기는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항상 완벽을 요구했던 아버지. 거기에 늘 부응해야만 했던 아카시. 결국 다른 인격을 만들 정도로 궁지에 몰렸던 것도. 엄연한 학대라고 생각한다. 몇 번 만난 적 없지만, 여전히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아버지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은 없었다. 언젠가 학대받은 아이는 자기 자식에게도 무의식중 그대로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기사가 사실이라면 아카시의 걱정도 아주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괜찮을 거야……."
마유즈미가 위로하듯 아카시의 등을 토닥였다. 부모가 되기 불안한 건 아카시 뿐만이 아니다. 마유즈미 또한 그랬으니깐.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지. 지금도 마유즈미는 불안했다. 더군다나 평범한 가정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부모가 되는 건 혼자가 아니다.
4.
"아기 이름 말인데요. 이건 어떨까요?"
"너 그걸로 보여준 이름이 100개는 넘은 거 알아?"
"정확히는 115개째입니다."
초음파 검사를 했던 날 이후로 아카시는 작명사전을 뒤지며 아이 이름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직 몇 개월이나 남은 데다가 성별도 모르는데도 아카시는 아이의 이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아카시가 지은 이름은 여자 이름으로 쓰이는 이름도 있고 남자 이름으로 쓰이는 이름도 있고 남녀 상관없이 쓰이는 이름도 있고 다양하다. 최대한 선택할 폭을 많이 만들고 싶대나 뭐라나. 극히 개인적인 이유긴 하다만 마유즈미는 남녀 공용으로 쓰이는 이름을 아이의 이름으로 쓰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예전부터 이름만 보고 여자로 오해 살 때가 많았다. 그런 오해를 사는 건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이름을 벌써 그렇게 지을 필요는 없잖아. 너 정말 유난…아……."
"마유즈미 선배……?"
얘기를 하다말고 마유즈미는 배를 움켜쥔다. 배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런 걸 태동이라고 하던가. 아프다거나 기분 나쁘지는 않다. 다만 자신의 안에 있는 다른 존재에 묘한 기분이 들 뿐이다. 움켜쥔 배를 보면 이제 눈에 띌 정도로 제법 부풀어 올랐다. 이래서야 실감이 안 난다 해도 이 안에 아기의 존재가 있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겠는데. 마유즈미가 쓴웃음을 짓는다.
"혹시 아기가 또 움직인 건가요…?"
아카시가 조심스레 물어온다. 마유즈미는 대답하는 대신 아카시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배 위로 갖다 댄다. 마유즈미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그 모습이 어쩐지 사랑스럽게 느껴져 마유즈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이쨩, 마유즈미 선배, 저희 왔어요-"
"나도 왔어, 아카시, 마유즈미 선배!"
"꺼억, 다들 잘 지내고 있었나?"
손님은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꽤나 그리운 얼굴들이었지만 손님의 얼굴들을 본 마유즈미의 얼굴이 굳는다. 그에 비에 아카시의 얼굴은 밝았다.
"무슨 일이야, 셋 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연락했는데, 아카시한테. 마유즈미 선배 못 들었어?"
"뭐?"
하야마의 말에 마유즈미는 아카시를 째릿 본다. 손님이 찾아올 예정이란 소리를 마유즈미는 아카시에게서 들은 적이 없다.
"가끔은 서프라이즈도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요."
"어머, 세이쨩. 마유즈미 선배한테는 말하지 않은 거야? 그럼 안되지. 우리가 집주인 허락도 안 받고 다짜고짜 불쑥 찾아온 게 돼버리잖아?"
아카시가 마유즈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말한다. 마유즈미의 편이 되어준 건 의외로 미부치였다. 그렇지만 그 미부치도 집을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할 수 없이 마유즈미는 그 셋을 집안으로 들인다.
마유즈미가 임신하고 나서 아카시와 마유즈미가 사는 집은 그 전이량 조금 변했다. 사과를 잘 먹는 마유즈미를 위한 사과가 곳곳에 있다던가, 라이트노벨이 있는 책장 구석을 비롯한 집안 곳곳에 육아와 임신에 관련된 책이 있다던가, 아기방을 따로 준비한다던가 하면서. 그중에서도 하야마는 아기방이 신기했던 건지 꽤 큰 소리를 내면서 큰 소리를 내면서 아기방을 구경했다. 이래서야 누가 애인지. 마유즈미는 푹 한숨을 내쉰다.
"자, 이건 내가 세이쨩이랑 마유즈미 선배에게 주는 선물."
마유즈미가 아기방에 들어간 하야마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으면 미부치가 마유즈미에게 상자를 건네왔다. 상자를 건네준 미부치가 열어봐도 좋다는 사인을 주면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아기 옷과 신발이 있었다. 신발을 꺼내면 손바닥에 올라올 정도로 작았다.
"…작네요."
"그러게……."
"두 사람도 참, 아기 물건이니깐 작은 건 당연하잖아?"
아기 옷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고 아카시가 사 오는 아기 옷만 하더라도 한가득이었지만 볼 때마다 감정이 벅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신발과 옷을 사용할 아기가 머지않아 태어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유즈미는 종종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된다.
"빨리 태어났으면 좋겠네. 두 사람의 아기."
그건 마유즈미도 늘 하는 생각이었다. 아직도 불안한 건 많다. 부모가 될 준비가 제대로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하루라도 빨리 아기가 태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이 집이 더 작아지려나. 아기 옷을 꺼내 보던 마유즈미의 입가가 느슨해진다.
5.
척 보아도 알 정도로 배는 부풀어 올랐다. 이제 곧 산달이었다. 남자용 임산 복은 없어서, 마유즈미는 여성용 임산 복을 입고 다녔다. 한때는 임신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우울감에 휩쌓였을 때도 있긴 하지만 그 시기도 지나갔다. 지금은 출산예정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도 마유즈미도 건강한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별문제 없이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통상적 임신은 아니기 때문에 수술은 불가피했다. 걱정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아이니깐 괜찮을 거라고 마유즈미는 생각한다.
움직이기가 버거워져 마유즈미가 침대에 기대 누워있으면 아카시가 그 옆에 누워 마유즈미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럴 때면 마유즈미는 어딘가 간지러워진다.
"매일 그러고 있는 거, 안질려?"
"저한테는 마유즈미 선배와 있는 하루하루가 새로운걸요. 질릴 리가요."
그렇게 말하며 아카시가 배를 쓰다듬으면 마치 아기가 뱃속에서 알아들은 듯 아기가 발길질한다. 막연한 행복감에 젖어서 마유즈미는 눈을 감는다.
수술 날은 금방 다가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수술은 착오 없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기도 마유즈미도 무사했다. 날을 정하고 했던 수술이기에 진통은 따로 없었다. 수술대에 올라가기 전 아카시가 울 거 같은 얼굴로 손을 잡아 주었다. 아카시의 저 표정을 요 몇 개월간 마유즈미는 꽤 보았다. 그리고 눈을 뜨면 아기를 안은 아카시의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아카시는 이미 한 차례 운 듯 눈가가 빨갰다. 아카시가 마유즈미에게 아이를 건네주면 마유즈미의 품 안에서 아이가 꼼지락거리며 움직였다. 여전히 마유즈미는 이 아이를 자신이 낳은 거란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지만, 아기는 분명 마유즈미 품 안에 살아있었다. 이번에는 마유즈미도 눈물이 났다.
그 뒤로 큰일들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낙갔다고 생각한다. 아기는 딸이었다. 대체 누굴 닮았는지 아기는 꽤 얌전한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육아라는 건 꽤 고된 일이었다. 그 아카시도 쩔쩔맬 정도였으니깐.
그동안 아카시와 마유즈미는 주변 도움을 꽤 받았다. 덕분에 아이는 별 탈 없이 무사히 커 어느새 초등학생이다. 평범한 가정의 형태는 아니지만,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굳이 문제를 찾는다면…
"아빠, 오늘도 시험 100점 맞았어-!"
"응, 그래. 잘했네. 있다가 세이쥬로 아빠한테도 보여주자."
"응!"
딸아이가 오늘도 신나서 100점 맞은 시험지를 마유즈미에게 보여준다. 신간 원고를 하던 마유즈미가 몸을 돌려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마유즈미의 입가가 느슨해졌다가 아이가 가져온 시험지를 보고 얼굴이 굳는다. 그래, 문제는 없다. 아이는 건강하고 이렇게 100점 맞은 시험지를 가져올 정도로 영특했다. 문제는 없다. 문제는 없다는 게 문제겠지.
딸아이가 100점짜리 시험지를 가져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학교에 들어간 이래 받아쓰기 같은 사소한 시험이라도 아이는 늘 만점을 놓친 적이 없다. 처음엔 마유즈미도 순수하게 기뻐하였으나 나이에 비해 정숙한 편인 딸아이를 보면 왠지 모를 불안이 밀려왔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지금껏 누군가에게 져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마유즈미가 볼 땐 그랬다. 아이들끼리 하는 가위바위보에서도 다 이겼었으니깐. 언젠가 아이에게 직접 져 본 적이 있냐고 물어봤을 때 한 번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와 마유즈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이건, 적신호가 아닐까.
아이에게 완벽을 요구하지 않을 것.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카시와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눴던 육아방침이었다. 그렇지만 따로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지지 않는다면. 그 아카시 세이쥬로의 자식이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 번도 지지 않았던 시절의 아카시를 떠올리고 마유즈미는 아찔해진다. 여전히 마유즈미는 그때의 아카시도 좋아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 자식이 그런 길을 걷는 건 별개다.
"이대로라면 분명 고등학교에 들어가 중2병에 걸려 부모라도 죽인다. 같은 대사를 하고 다닐 거야……."
"그런 말은 대체 누가 알려주었… 아니, 그전에 진정하세요, 치히로씨."
얼굴을 묻고 마유즈미가 침울해져 있으면 아카시가 위로했다. 아이는 밖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부모라도―의 대사는 마유즈미가 직접 들은 건 아니다. 마유즈미도 언젠가 쿠로코한테 들었던 얘기다. 꽤 충격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시절의 아카시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만약 밖에 있는 저 아이가 그 시절 아카시처럼 크게 된다면. 마유즈미는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해진다.
"…망할 아카시 유전자."
"은근슬쩍 제 욕하지 마세요."
한숨을 쉬며 마유즈미에게 타박하듯 말했지만 아카시또한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다. 아이와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던 건 아카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카시도 어렸을 때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만점만을 받았던 때가 있다. 처음에는 그저 기뻤다. 하지만 언젠가 그것이 괴로운 지점이 온다. 아카시 자신이 경험자니 알고 있었다.
"…제가 얘기해볼게요."
아카시가 결심하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유즈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100점 맞았다고?"
"응, 선생님도 칭찬해줬어-!"
아카시가 다가가 말을 꺼내면 아이가 아카시를 올려보며 활짝 웃는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어린 시절의 어머니에게 칭찬을 받던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여서 아카시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렸던 자신은 이런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아카시는 일순 그리운 향수에 잠긴다.
"그건 굉장하네."
아카시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아이는 더 환히 웃었다. 이 아이보다 더 환하게 웃는 아이는 없을 거라고, 아카시는 생각하고는 한다. 그만큼 아이의 웃음은 아카시에게 있어서 꽤 특별한 것이었다.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는 게 좋을지 아카시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려운 일이다. 부모가 된다는 건 힘든 일이라고 아카시는 새삼 생각한다.
"―100점 맞은 건 분명 굉장한 일이지만 그래도 늘 100점을 맞아올 필요는 없어. 늘 이길 필요도 없고. 꼭 완벽하지 않아도 돼."
고민하다가 아카시는 조심스레 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아카시의 말을 들은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아이는 과연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걸까. 역시 아직 이른 말이었을까, 아카시는 생각에 빠진 아이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완벽한 인간이 없는 거 정도는 알아. 그래도 꼭 이길 필요는 없지만 이길 수 있는데 일부러 질 필요도 없는 거잖아."
아이가 입을 비죽 내밀며 말한다. 이번에는 아카시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길 수 있는데 일부러 질 필요는 없다. 맞는 말이었다. 완벽함에 집착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완벽하지 않은 것에 집착할 필요 또한 없는데.
"그렇지, 그건… 분명 그렇네. 아빠가 생각이 짧았어."
다시 아카시가 머리를 쓰다듬으면 아이는 순수하게 기뻐한다. 역시 괜한 걱정이었어. 이 아이라면 자신과 다르게 괜찮을 거다. 아카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