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선발행으로 냈던 적먹 단편집에 추가로 썼던 단편 중 하나 입니다.
아이지가 적먹 사귀는거 인증 시켜준 기념으로 업로드. 단편집의 나머지 추가 단편들도 천천히 웹발행 할 예정입니다
"이게, 뭐야……?"
웬만한 일에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는 마유즈미지만 이번에는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의 집 앞에 딱 보아도 고급스러운 자동차와 그 앞에 카펫까지 깔린 광경을 보고 넋을 잃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마유즈미는 그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후배의 전화를 받고 나왔을 뿐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유즈미 선배."
현실감 없는 광경에 마유즈미가 정지하고 있으면 전화로 마유즈미를 불러낸 당사자가 차 안에서 나왔다. 아카시 세이쥬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어디까지나 막연한 것이었다. 소문은 마유즈미도 이래저래 들었지만 아카시가 학교에서 자신의 집안을 드러내는 일은 없어 이제껏 실감한 적이 없었다. 눈앞에서 보고 나서야 마유즈미는 실감한다. 역시나 사는 세계가 다른 도련님이라고.
"그래서 무슨 일이야…?"
마유즈미가 겨우 입을 연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카시가 자신의 집 앞에 이렇게 갑작스레 나타날 일이 없다. 농구부 주장과 매니저로서 얼굴을 맞댈 일이 많기는 했지만, 그것도 예전 일이다. 마유즈미가 농구부 매니저를 은퇴한 건 오래전 일이고 바로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지금의 마유즈미는 같은 학교 선배도 아니고 그저 입학을 기다리는 예비 대학생 신분일 뿐이었다. 이제 농구부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마
유즈미를 아카시가 직접 찾아 집까지 행차할 이유 따위, 마유즈미로선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에는 저도 나름의 각오가 필요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네요."
각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녀석. 마유즈미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아카시가 조금 얼굴을 붉힌 채 입을 열었다.
"그게, 발렌타인 데이에 마유즈미 선배가 저에게 초콜릿을 주셨잖아요? 오늘은 화이트데이니깐 그에 대한 답례를 하기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발렌타인? …아."
그제야 마유즈미는 떠올린다. 분명 그랬다. 아카시의 말대로 발렌타인데이에 마유즈미가 아카시에게 초콜릿을 주기는 했다.
본래 마유즈미는 발렌타인 데이 같은 건 챙기지 않는다. 발렌타인데이 같은 것도 결국은 상술의 일환일 뿐이었다. 초콜릿 따위 특별한 기념일이 아니어도 먹고 싶을 때 먹으면 그만인 것을.
그날도 본래는 발렌타인 데이 따위 전혀 챙길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발렌타인데이의 학교라는 곳은 초콜릿이 넘쳐나는 곳이다. 전혀 생각도 없던 마유즈미에게도 몇 개인가 초콜릿이 손에 떨어졌었다. 발렌타인데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초콜릿 그 자체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마유즈미 본인이 먹어도 그만이었지만 마침 복도에서 지나가는 아카시가 보여 마유즈미는 몇 개의 초콜릿을 아카시 손에 쥐여주었다. 분명 그뿐일 텐데?
"그러니까 발렌타인 데이의 답례를 하러 왔다고? 차까지 끌고?"
"그건… 가능하면 혼자 올 생각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레스토랑에 가려면 교통수단은 필요할 거 같아서요."
"레스토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 화이트 데이 답례입니다. 초콜릿에 대한 답례로 식사대접을 해드리고 싶어요."
답례라니, 겨우 싸구려 초콜릿 몇 개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아 아카시의 얼굴을 보았지만 아카시의 얼굴은 진심 같았다. 애초에 이런 걸로 장난칠 사람도 아니었긴 하지만. 부자들은 다 이런가? 혼란스런 머리를 부여잡고 마유즈미는 사는 세계가 다른 부자들의 스케일에 놀란다.
"혹시 곤란 하신가요…? 역시 갑작스럽게 찾아오면 아무리 예정된 스케줄이 없다 해도 당황 하시겠죠… 마유즈미 선배가 내키지 않으신다면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아, 아니! 싫은 건 아냐! 조금 당황했을 뿐이니까…!"
"그럼 같이 가주시는 거죠?"
아차. 자신도 모르게 나온 반응에 난감했던 것도 잠시, 이내 마유즈미는 체념한다. 아카시의 말대로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기도 했다. 의리초코에 어디까지 스케일이 커진 건가 싶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색다른 경험으로서 아카시를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고 있으면 아카시가 마유즈미에게로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어왔다.
"이건 또 뭐야?"
"어울리는 옷을 미리 준비해왔습니다."
"어울리는 옷이라니, 지금 이걸 입으라고?"
얼떨떨하게 마유즈미가 물으면 아카시는 대답 없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아카시가 준비할만한 레스토랑이다. 분명 서민으로 살아온 마유즈미로선 상상도 못 할 고급스러운 자리겠지. 그런 자리에는 보통 장소에 맞는 옷이란 게 존재할 터였다. 거기에 맞는 옷을 마유즈미가 갖고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아카시가 준비한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하다니. 부담감에 몸부림칠 정도지만 이미 가기로 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마유즈미는 아카시에게서 옷을 든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러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입고와 주세요."
"하아……."
한숨을 쉬면서도 마유즈미는 순순히 아카시의 말에 따른다. 졸업한 선배를 마음대로 휘두르다니. 정말 제멋대로인 주장이라니깐. 마유즈미는 혀를 차고는 옷을 입기 위해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
집으로 들어간 마유즈미의 뒷모습을 보며 아카시는 옷을 입고 나올 마유즈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몇 주 전부터 아카시가 직접 엄선해 고른 옷이다. 분명 잘 어울릴 터다.
그다지 자랑할 것은 안 되지만 아카시는 본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평소에도 종종 여성의 고백을 받는 아카시지만 발렌타인데이 때는 그 분위기에 맞춰 고백해오는 여학생들이 훨씬 더 많다. 발렌타인데이 때 마유즈미를 복도에서 만났던 건 이어지는 고백 세례에 조금 지쳤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그때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손에 초콜릿 몇 개를 쥐여주고는 그대로 떠난 것이다. 지금까지 받은 수많은 초콜릿에 비하면 분명 정성도 사랑도 들어가지 않은 초콜릿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마유즈미가 준 초콜릿이다. 발렌타인이 오기 며칠 전부터 라쿠잔 고등학교 내의 여학생들이 학년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발렌타인에 푹 빠져 있을 때도 그녀는 하나도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런 마유즈미가 준 초콜릿. 나중에 따로 알아보면 마유즈미가 초콜릿을 준 남성은 아카시 자신뿐이었던 거 같다. 같은 농구부인 하야마나 네부야, 미부치도 그날 마유즈미를 만났지만, 초콜릿은 전혀 받지 못한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건 마유즈미의 마음이라고 봐도 될 것이라고, 아카시는 최종적으로 결론을 냈다.
오늘은 화이트데이. 그 마음에 대해 답례를 하는 날이었다. 한 달간 아카시도 고민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결론을 냈다. 예약한 레스토랑은 분위기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준비는 완벽하다. 주머니 속의 프러포즈용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아카시는 마유즈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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