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유즈미를 내려보는 아카시의 시선에도 힘이 들어간다. 아카시가 마유즈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마유즈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자신이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에 마유즈미가 약한 건 아카시도 알고 있었다.
"―아니, 부족해. 가져도 가져도 부족하니깐, 다 줘."
잡힌 손이 꽉 잡아진다. 이번엔 마유즈미 쪽에서 잡은 손이다. 평소라면, 마유즈미는 좀처럼 아카시를 이런 식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마유즈미 치히로는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니깐. 그 점마저도 아카시에게 있어서는 사랑스러웠지만 좀처럼 아카시를 속박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 마유즈미에게 내심 불안하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런 마유즈미의 입에서 자신을 달라는 말이 나온 건 오늘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일까.
"―네, 기꺼이."
모두 마유즈미 거였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자신을 원하는 마유즈미가 사랑스러워 아카시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눈가에 입을 맞춘다. 그래도 부족해서 입을 맞췄다. 마유즈미가 아카시의 팔에 목을 걸어 끌어당겼다.
또다시 당신의 생일이 왔다. 올해도 여전히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큰 환희를 안겨주는지 당신은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당신 옆에는 내가, 내 옆에는 당신이 있다. 그거면 충분했다. 당신이 태어난 축복의 날을 여전히 나는 당신과 보낸다. 그 사실이 아카시는 눈물 날 정도로 기뻤다.
어렸을 땐 제법 듣던 말이다. 대체 그 귀염성이란 무엇인가. 자신을 보며 자못 아쉬운 듯 말하는 어른들을 보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해서 마유즈미가 귀엽다는 감정을 못 느낀 건 아니다. 평범하고 무난하게 귀엽다고 일컬어지는 새끼 고양이를 보면 귀엽다고 느끼는 감정 정도는 마유즈미에게도 있었다. 이밖에도 세상에 귀여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는 많다. 이를테면 마유즈미가 보는 라이트노벨에 나오는 사랑스런 토끼 귀가 달린 여동생 캐릭터가 그러했다. 확실히 그런 존재들과 마유즈미의 공통점은 없다. 그렇다면 귀염성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지. 마유즈미는 납득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딱히 아쉽지 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시간은 흘러 마유즈미는 이제 어린애서는 졸업할 나이가 됐다. 더는 마유즈미를 보며 귀엽지 않아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가끔 부모님이 하나뿐인 아들을 보며 귀염성 없는 성격이라 한탄했던 거 같기도 하지만 마유즈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고등학생 즈음 되면 귀엽다는 말에는 졸업할 때다. 애초에 귀염성 없다는 말을 들었던 마유즈미에게는 별로 상관 없을 테지만. 분명 그랬을 터다.
"―마유즈미 선배, 귀여워요."
아카시가 마유즈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훑으며 말한다. 그 손길이 간지러워 마유즈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그 모습이 더 사랑스럽다는 듯 아카시가 넌지시 미소지었다.
"시…끄러워."
마유즈미는 고개를 돌린다.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마음대로 자세를 돌릴 수 없었다. 아카시가 몸을 위에서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카시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둘만의 시간이 되면 마유즈미에게 귀엽다고 속삭여준다. 그럴 때마다 마유즈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귀엽다는 소리에는 면역이 없다. 마유즈미에게 귀엽다는 소리를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아카시 뿐이다. 도대체 아카시는 자신의 무얼 보고 귀엽다고 하는 건지. 마유즈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내 어디가 귀엽다는 거야?"
머리카락을 훑던 손길이 뺨을 쓰다듬기 시작했을 때 결국 참지 못하고 발끈한 마유즈미가 툴툴거리며 물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아카시를 올려보면 여전히 아카시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마유즈미를 응시하고 있다. 마유즈미는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 점이 귀엽다는 거예요."
뺨을 천천히 쓰다듬던 손이 멈춰 마유즈미의 고정한다. 마유즈미를 덮고 있는 아카시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와 더 짙어졌다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대로 입술이 닿는다. 정말 취향 이상한 녀석.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마유즈미는 그대로 몸을 맡겼다.
오래간만에 만난 마유즈미의 얼굴이 제법 낯설다. 그 이유가 마유즈미가 쓰고 있는 안경 때문이라는 걸 아카시는 한 박자 늦게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맞댄 것이 2개월 전이던가. 그때만 해도 마유즈미는 안경을 쓰지 않았을 터다. 2개월간 서로 바빠 라인으로 연락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주고받은 연락에서도 안경을 썼다는 말은 없었을 텐데. 오래간만에 만난 낯선 연인의 모습에 아카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쉽사리 찾을 수 없다.
"한 달… 정도인가. 요즘 앞에 있는 게 잘 안 보인다 싶어서 안과에 갔더니 안경을 맞춰야겠다 해서."
"그러길래 제가 너무 늦게까지 책을 보거나 컴퓨터 하지 말랬잖아요?"
"시끄러. 네가 내 보호자라도 되냐."
퉁명스러운 마유즈미의 대답에 아카시가 짧게 한숨을 쉰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생활 습관에 관해서는 마유즈미도 충분히 반성하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 이제 제법 쓰는 것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안경을 쓰고 다니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잔소리를 듣는 건 기분 좋진 않았다. 이래서 안경을 쓰고나서도 얘기를 안 했던 건데. 쳇, 마유즈미는 괜스레 속으로 혀를 찬다.
"이미 안경을 쓰게 됐으니 이제서 생활습관을 지적해도 어쩔 수 없겠네요."
아카시가 다시 한숨을 쉬며 말한다. 딱히 아카시에게 잘못한 것도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해도 마유즈미의 마음 한편에 드는 죄악감은 어쩔 수 없다.
"―그보다, 안경 잘 어울리네요, 마유즈미 선배."
방금까지 화내던 기색은 어디 갔는지 아카시가 싱긋 웃으며 눈을 맞춰 온다. 예상치 못한 산뜻한 칭찬에 얼굴에 열이 올라 마유즈미는 시선을 내려버린다.
마유즈미가 안경을 끼고 다닌 지도 이제 한 달. 그동안 마유즈미는 안경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소리를 한 건 아카시가 처음이다. 존재감이 적은 마유즈미는 대학에서도 그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물며 클래스에 얽매이지 않는 대학이란 건 본인이 원한다면 타인과의 관계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원래 사람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성격인 마유즈미에게는 어떤 의미로는 딱 맞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마유즈미에게 안경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줄 사람은 아카시 뿐이다.
"뭐야, 너 혹시 안경 취향이라도 있었던 거야?"
빤히 보는 시선에 낯간지러워져 괜스레 툴툴거리면 아카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돌렸지만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글쎄요. 저한테 그런 취미는 없긴 합니다만."
마유즈미의 얼굴에 손이 뻗어진다. 뻗어진 손에 의해 안경은 쉽게 벗겨진다. 아카시의 손이었다. 갑작스레 벗겨진 안경에 시계가 흔들렸다.
"―사실은, 마유즈미 선배의 얼굴이면 다 좋아하긴 하지만요."
마유즈미의 얼굴에서 안경을 벗긴 아카시가 발돋움해 마유즈미의 눈가에 입을 맞춘다. 안경을 벗으면 눈앞의 아카시가 흐릿하게 보였다. 역시 시력이 나빠진 건 조금 아쉬운 일일지도. 약간의 후회를 하며 마유즈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카페 안에 커피 향이 감돈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그 향을 마유즈미는 좋아했다. 이 직업을 택한 이유가 딱히 그것 때문은 아니긴 했지만. 방금 내린 커피가 손님을 위한 거라면 커피 위에 하트든 나뭇잎이든 그렸을 테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런 걸 그리지 않아도 커피 맛은 다 똑같은데. 직접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마유즈미는 생각한다.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마유즈미가 선곡한 재즈 음악이다. 조용한 시간이었다. 막 카페를 오픈한 한가한 시간 또한 마유즈미는 좋아했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다. 계속 이렇게 조용하면 좋을텐데. 못다 읽은 책을 들며 생각한다. 진짜로 손님이 없다면 카페 문을 닫아야 하니 그냥 실없는 생각일 뿐이지만.
문에 달린 방울이 소리를 낸 건 마유즈미가 마악 책을 펼치고 1페이지를 읽는 도중이었다. 쳇, 한창 좋을 때였는데. 정말 눈치가 없는 손님이네. 속으로 혀를 찼지만 마유즈미는 애써 표정을 고친다. 어쨌건 손님은 손님이다. 마유즈미는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서 오세…켁."
"손님을 보고 그런 반응이라니, 너무 한 거 아닌가요?"
"이런 반응이라 미안하게 됐네."
첫 손님으로 네 얼굴을 보는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지 그래. 마유즈미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말을 듣고도 아카시는 웃을 뿐이다. 아카시가 언제나처럼 마유즈미가 있는 카운터와 제일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 잡는다.
"항상 마시는 그거로 주면 되나?"
"네, 부탁드립니다."
마유즈미는 찬장의 코코아 가루를 꺼낸다. 아카시는 의외로 입맛이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다.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카시는 그래도 아카시는 쓴 커피보다 단 핫초코 쪽을 더 선호했다. 마유즈미도 그 사실을 안 것은 얼마 안 됐다. 아마 이곳에서 카페를 내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는 사실이었겠지.
큰맘 먹고 낸 개인 카페가 하필 고등학교 후배가 다니는 회사의 건물일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제 와서 확률을 논해도 소용없겠지. 바로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깐. 그 말대로다. 얼마 전까지 평범한 회사원이던 마유즈미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 카페를 차렸다. 자리도 좋고 세도 그리 비싸지 않아 처음 카페 일을 시작하려는 마유즈미에게는 제법 괜찮은 조건이었다. 카페를 차리기로 하고 이곳을 발견한 마유즈미는 곧장 큰 고민 없이 계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유즈미는 이곳에서 졸업하고 만난 적 없는 고등학교 후배와 재회하게 될 거라고 전혀 예상 못 했다.
"자, 여기."
완성된 핫초코는 마유즈미가 직접 아카시가 있는 테이블에 갖다 주었다. 원래 마유즈미의 카페에서는 주문받은 음료를 손님이 직접 가져가게 되어있지만 다른 손님도 없고 뭐, 괜찮을까. 마유즈미는 그 정도로 융통성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유즈미는 다시 카운터에 들어가는 대신 아카시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아까 읽던 책을 펼쳤다. 아카시 말고 다른 손님이 온다면 다시 들어가야겠지만 지금은 괜찮겠지. 아카시는 아무 말 않고 마유즈미가 가져다준 핫초코를 홀짝인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읽던 책의 책장을 넘기며 마유즈미는 넌지시 생각한다.
"잘 마셨습니다."
"아, 이제 가보려고?"
"네, 잠시 틈을 내서 오긴 했지만, 언제까지고 회사를 비울 순 없으니깐요."
하긴 그렇지. 핫초코를 다 마신 아카시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며 마유즈미는 수긍했다. 아카시의 회사에서의 직책은 이사라고 들었다. 그 나이에 벌써, 라는 생각이 안 들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아카시라면 자연스럽게 납득 되었다. 아카시라면 당장 대기업 사장직을 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마유즈미가 기억하는 아카시는 늘 높은 곳이 어울리는 남자였으니깐. 마유즈미는 아카시 밑에서 일하는 사원들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밑에서 일하는 자신도 상상해보다가 얼른 그만둔다. 아카시의 아래에 있던 경험은 고등학교 때면 충분했다.
"있다 또 올게요."
"됐어, 네가 있음 정신 사나우니깐."
"하하, 그런가요."
매정하리만큼 퉁명스러운 마유즈미의 대답에도 아카시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긴다. 항상 그랬다.
"그럼 있다 뵙죠, 마유즈미 선배."
그 말과 함께 아카시는 카페를 나선다. 이번에는 나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방울 소리가 멎으면 카페 안은 다시 마유즈미 혼자가 된다.
"있다가 또, 인가…"
혼자 있는 카페 안에서 마유즈미가 중얼거린다. 아카시 앞에선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아카시가 다시 오는 순간이 내심 기대되는 건 마유즈미도 어쩔 수 없었다.
마유즈미가 고양이가 되어버렸다. 야옹 하고 우는 바로 그 고양이다. 사건은 전조도 없이 갑자기 일어났다. 아카시는 여느 때처럼 밖에서 볼 일을 마치고 마유즈미와 동거하고 있는 집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곳에 마유즈미는 있었다. 정확히는 고양이로 변한 마유즈미가. 머리 위에 생긴 귀와 뒤에 달린 꼬리는 아무리 봐도 고양이의 것이었다. 거기에 고양이가 된 마유즈미는 아무래도 사람 말을 못하는 거 같다. 아무리 아카시가 말을 걸어도 마치 진짜 고양이가 울 듯이 냐아냐아 거릴 뿐이다.
처음엔 아카시도 장난인 줄로만 알았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고양이로 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애초에 마유즈미는 이런 장난을 즐겨할 성격이 아니다. 거기에 마유즈미에게 달린 귀랑 꼬리는 아무래도 진짜 같았다. 혹시 마유즈미가 장난을 치기 위해 붙여놓은 게 아닐까 싶어 귀와 꼬리를 당겼을 때 마유즈미가 아파하여 아카시는 얼른 손을 뗐다. 귀와 꼬리는 마유즈미의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색이었다.
지금 마유즈미는 아카시가 가져다준 실타래를 굴리며 노는 중이었다. 고양이들이 잘 가지고 논다는 소리를 듣고 혹시나 해 가져왔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잘 가지고 놀 줄 몰랐는데. 아카시는 조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더는 옷을 안 벗으려고 한 점은 다행이었다. 아무리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렸다지만 마유즈미의 몸은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고양이가 된 마유즈미한테 인간의 옷은 불편했던 건지 아카시가 옷을 입혀도 금방 벗어버리려고 했다. 마유즈미는 정말 고양이가 된 걸까.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카시는 작게 한숨을 쉰다.
"냐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으면 어느새 마유즈미가 아카시 앞에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유즈미를 올려 보고 있다. 고양이인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행동에 민감했다.
"이런, 걱정 끼친 거 같네요. 저는 괜찮아요, 마유즈미 선배."
"냐아……."
마유즈미를 안심시키듯이 아카시가 마유즈미의 턱을 쓰다듬어 주면 마유즈미가 기분 좋은 듯 눈을 감는다. 기분 좋아 보이는 마유즈미를 보며 아카시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간다. 머지않아 마유즈미가 자신의 머리를 아카시에게 부빗거리며 치댄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고양이들은 애정표현으로 몸을 부비적거리기도 한다고. 혹시 마유즈미는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카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튼 마유즈미 선배, 라는 건가……."
아카시가 작게 중얼거리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마유즈미가 목을 갸웃하고 기울였다. 아카시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로 턱을 쓰다듬어 주면 마유즈미는 다시 기분 좋은 표정으로 아카시의 손길에 열중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른다. 마유즈미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해결책도 모른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게 틀림없는 마유즈미 치히로라면 이것 또한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고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생각해버렸다.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아카시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출국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해야 할 일은 따로 없었다. 짐은 앞으로 살게 될 집에 미리 우편으로 보냈고 당장 필요한 건 수하물로 붙였으니깐. 아카시가 떠나는 길을 배웅 온 라쿠잔의 3학년들과도 방금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헤어지고 온 길이다.
그렇지만 아카시는 선뜻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앞으로 나가는 게 무서운 건 아니다. 아니,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그렇다 해도 이 결정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 건 다름 아닌 아카시 본인이니깐. 다만…
아카시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다. 확인 못 한 메시지가 1건 있었다.
[아카시군, 직접 배웅하러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모쪼록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미국에서 카가미군이나 아오미네군, 키세군, 미도리마군, 무라사키바라군을 만난다면 저 대신 안부 물어봐 주세요.]
보낸 사람은 쿠로코다. 중학교 동창의 메시지를 보고 아카시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어진다. 그러고 보니 쿠로코한테는 이걸로 6번째겠군. 동급생의 친구를 미국으로 보내는 일이다. 자신이 마지막이었다.
시작은 카가미였다. 재버워크와 보팔소드를 결성하여 싸우기 전에 미국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카가미는 재버워크와의 경기가 끝난 뒤 결심이 선 듯 미국행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 아카시를 비롯한 기적의 세대에게도 미국에서 스카우트가 들어왔다. 재버워크와의 경기 영상이 미국까지 유명해질 정도로 퍼진 것이 계기였다. 확실히 농구를 계속하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저마다의 고민이 있었을 테지만 결국 5명 전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5명 중 가장 먼저 미국으로 간 건 아오미네였다. 그리고 남은 3명이 결정할 때까지도 아카시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카시가의 후계자로서 할 일 또한 아카시에게는 많았으니깐. 그렇지만 아카시도 결국 이렇게 미국행 비행기 표를 끊고 이렇게 공항에 나와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농구가 좋았으니깐. 그러니 아카시에게는 후회가 없다. 아버지에게 미국으로 간다는 뜻을 밝힐 때는 여차할 땐 가출까지 불사하겠다 생각했지만 마음대로 하라는 허락은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선뜻 발을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후회보단 약간의 미련, 같은 걸까.
아카시에게 온 메시지는 쿠로코에게서 온 1건뿐이었다. 오늘 떠난다는 말은 분명 전했을 텐데. 읽었다는 표시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뿐. 답장은 역시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전화를. 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스마트폰 내의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찾았다. 마유즈미 치히로. 그 이름을 한참 노려보다가 아카시는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스마트폰의 전원을 끈다.
그가 졸업 후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전화를 걸어본 적도 없다. 오늘 미국으로 떠난다는 메시지를 아카시 쪽에서 보내기 전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이제 와서 전화를 걸어도 이상하겠지.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는데.'
떠오른 생각을 아카시는 애써 삼킨다. 아카시에게 있어서는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다만 깨닫는 것이 늦어버렸다.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감정의 정체가 사랑임을 깨달았을 땐 이미 마유즈미는 졸업한 뒤였으니깐. 사랑을 자각한 뒤에도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만나지 않았다. 이미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지 꽤 되었단 이유도 있지만 아카시가 다시 연락했을 때 나올 마유즈미의 반응이 무섭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은 없다. 그건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아카시의 일방적인 미련이다. 상대 쪽도 같은 마음일 리 없었다.
발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계속 이곳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발을 겨우 떼고 발을 옮긴다.
"아카시…!"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옮기려던 발을 멈추고 아카시는 바로 뒤를 돌아본다. 목소리가 난 쪽을 본 아카시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소리가 난 쪽을 보면 아카시의 뒤쪽 멀리서 마유즈미가 헐떡이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방금까지 공항으로 뛰어온 듯했다.
"마유즈미… 선배…?"
마유즈미가 어째서 여기에.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 아카시는 마유즈미에게로 뛰어갔다. 마유즈미가 여기에 있는 이유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마유즈미는 여기 있는 거니깐. 순식간에 자신에게 달려온 아카시를 보고도 마유즈미는 아직 숨이 찬 것인지 가쁘게 숨을 고른다. 마유즈미의 호흡이 정돈될 때까지 아카시는 잠시 기다린다. 숨을 고르는 마유즈미가 아카시를 힐끗 보며 눈을 맞춰온다. 오래간만에 맞춘 시선에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을 아카시는 꾹 눌러 담는다.
"마유즈미 선배가 여기 어쩐 일로…"
"…네가, 나한테 보냈잖아. 오늘 이 시간에 떠날 거라고."
"네… 분명 그랬죠."
그렇지만 거기에 답장은 하지 않으셨잖아요. 라는 말은 삼킨다. 지금 이곳에 마유즈미가 있다. 그 사실 외에 다른 건 아카시는 아무래도 좋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건 마유즈미의 졸업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할 말이 아주 많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맞추고 있으면 서로의 생각이 흘러들어 왔다. 반년 이상 지났으나 농구부 있을 적 했던 아이컨택 훈련의 효과는 아직 유효했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은 건 마유즈미 쪽이다.
"그, 아무튼 이제 가는 거지…?"
"네, 이제 곧 비행기를 탈 시간이라."
"……."
"이렇게 공항까지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선배를 뵐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멋쩍게 입을 뗀 마유즈미와 다르게 산뜻한 얼굴로 아카시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이걸로 마유즈미에 대한 감정을 접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미련이 없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이렇게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아카시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일본에는, 다시 돌아오긴 하는 거지…?"
"네, 아마도…….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 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카시 너니깐 알아서 잘하겠지. 뭐, 내가 조언해 줄 위치도 아니고. 그러니깐… 잘, 다녀와."
여전히 멋쩍은 듯이 마유즈미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마유즈미 선배…!"
"아, 잠깐만, 아카시…!"
마유즈미의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때 참을 수 없어져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끌어안았다. 끌어안겨 진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천천히 아카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잘 다녀와. 마유즈미가 아카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말한다. 분명 자신은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거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조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녀올게요. 미국에서도 연락해도 될까요."
"그건… 뭐, 마음대로 해."
마유즈미를 껴안은 채로 슬쩍 시계를 확인하면 이제 정말 슬슬 비행기를 타러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뛰어가면 어떻게든 맞출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껴안는 팔에 힘을 준다. 팔 안의 온기를 조금만 더 느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