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눈을 뜬다. 흐릿한 시야로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른한 한숨을 흘리면 희미하게 약품 냄새가 났다. 여기는 학교 양호실인가, 나는 왜… 무거운 머리는 사고가 빨리 돌아가지 않는다.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천천히 떠올려 본다. 일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벼운 현기증이 나서 눈을 찡그렸다.
"정신이 들었나."
그제야 마유즈미는 곁에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아카시가 있다. 마유즈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신은 농구부에서 체력훈련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체력훈련의 기초 중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달리기. 분명 1군 전원이 같이 출발했을 터인데 마유즈미가 1군 무리에 한참 뒤처지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달리는 도중의 태양이 유달리 뜨거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여름이라고 일기예보에서도 말했던 거 같기도 하다. 뒤처진 마유즈미는 앞서 달리는 괴물 같은 녀석들을 향해 혀를 찼었다. 그리고…
"기억이 나는 건가? 달리는 도중 쓰러진 너를 내가 양호실로 데려왔다. 아무래도 가벼운 일사병인 거 같더군."
아카시의 말에 마유즈미는 전부 기억해낸다. 뜨거운 햇볕을, 마유즈미는 견디며 달렸다. 그러던 중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렇지만 마유즈미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1군 무리와 꽤 떨어진 상태였다. 이대로 더 차이를 낼 순 없었다. 머지않아 마유즈미의 의사와 상관없이 눈이 감겼다. 그 이후로의 기억은 끊겼다. 기억나지 않는다.
"…용케 발견해서 들고 왔네. 그쪽이 있던 선두 무리에서는 꽤 떨어져 있었을 텐데 말이지."
"몰랐나? 나는 치히로의 뒤에서 달리고 있었어. 주장은 맨 뒤에서 달리는 게 원칙이야. 뒤쪽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깐."
아, 그러셔. 주장님도 힘들겠어. 마유즈미는 작게 혀를 찬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생각했다. 기존 1군의 무리에서 뒤처져 쓰러지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 녀석한테 발견되다니. 원래라면 쓰러진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해야겠지만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아카시쪽도 주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생각할 테니 상관없나. 마유즈미는 고개를 돌려 아카시의 시선을 피했다.
"오늘은 내 불찰이다. 치히로가 이렇게 햇빛에 약할 줄 몰랐어. 오늘 일은 예상외였다. 앞으론 주의하도록 하지."
"…미안하게 됐어, 이렇게 햇빛에 약해서. 내가 그만 주장님 소중한 연습시간을 빼앗아버렸네."
마치 자신이 쓰러진 일을 탓하는 목소리로 들려 발끈해 말해버린다. 마유즈미는 혀를 찬다. 고개는 여전히 돌린 채였다.
깨어나는 모습도 봤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될 터인데 아카시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유즈미의 미간이 좁혀진다.
"…후후, 별로 치히로를 탓할 생각은 없어. 오늘 일은 아까 말했듯이 나의 불찰이다. 치히로가 햇빛에 약하다는 예상을 하지 못한 건 유감이야. 하지만 치히로의 체력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야. 체력뿐 아니라 농구 기술도 나날이 좋아지고 있지. 정말 칭찬하고 싶을 정도야."
"……."
"너라면 분명 테츠야를 뛰어넘는 라쿠잔의 식스맨이 될 수 있을 거야."
또 그 소리. 식스맨으로서 선수로 복귀하고 나서 이래로, 아니 아카시와 만나면서부터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었다. 쿠로코 테츠야. 테이코의 원조 환상의 식스맨.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마유즈미가 누구보다도 의식하는 존재였다.
자신이 하는 건 역시 그의 카피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마유즈미는 종종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아카시는 마유즈미에게 말한다. 너라면 테츠야를 뛰어넘는 라쿠잔의 식스맨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아카시와 시선을 맞춘다. 자신을 보는 아카시의 표정이 상냥하게 보이는 것은 열이 있기 때문일까.
아무말 않고 바라보고 있으면 아카시가 손을 뻗어온다. 손끝은 마유즈미의 얼굴에 닿는다.
"아카시……."
"라쿠잔의 승리를 위해, 기대하고 있어. 치히로."
아카시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방금 쓰러진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해도 말이지.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얼굴에 닿은 손끝이 차갑다. 그 온도를 느끼며 마유즈미는 눈을 감았다.
조용히 눈을 뜬다. 눈을 뜬 아카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인식하려는 듯하다. 침대 쪽에서 작게 신음소리가 들려 아카시는 그리로 시선을 옮긴다. 침대엔 마유즈미가 누워있었다. 다시 의식을 잃은 마유즈미를 곁에서 지켜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가벼운 일사병일 뿐, 자신은 이대로 돌아가도 좋으련만. 아무래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꽤나 아끼고 있나 보네."
이 마유즈미 치히로라는 사람을. 남의 일처럼 아카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들을 상대는 없었다. 나(僕)는, 또 다른 자신은, 지금은 잠시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의 아카시가 나올 수 있던 건 그 틈을 봐서 나올 수 있던 것이다. 평소엔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는 또 하나의 아카시지만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나오는 것도 가능했다. 어디까지나 이 몸은 아카시 세이쥬로의 것이니깐.
'그래 봤자 일시적인 것이지.'
이렇게 틈을 봐서 가끔 나올 수 있다 해도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주도권은 여전히 저쪽에 있고 이쪽은 틈을 봐서 나오는 게 고작이니깐.
역시 해결법은 또 다른 자신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뿐이다.
또 다른 자신은 승리에 집착하는 자신의 나약한 면에서 온 것. 그렇다면 내(僕)가 패배를 경험하면 나(僕)는 사라질 거라고, 아카시는 확신했다. 그리고 나(僕)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건 중학교 때의 동료들이라고 아카시는 믿었다. 그들이라면 분명 자신을 쓰러트려 주겠지.
"새로운, 환상의 식스맨인가."
마유즈미를 보며 아카시가 중얼거린다. 마유즈미는 여전히 작은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은 채다.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마유즈미 치히로. 내(僕)가 찾아낸, 쿠로코를 대신할 새로운 식스맨. 단순한 상대라면 식스맨의 존재는 필요 없다. 하지만 상대는 기적의 세대. 평범한 방법만으로는 힘들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나(僕)는 쿠로코를 대신할 새로운 식스맨을 찾은 걸 테지. 압도적인 실력 차가 난다면 힘의 차이로 이기면 그만이지만 힘의 차이가 거의 나지 않거나 대등할 때는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시합의 흐름을 바꾸는 식스맨의 존재는 매우 유용하다. 이것은 지금의 아카시도 한 때 같은 생각이었다. 같은 이유로 쿠로코를 식스맨으로 들인 건 다름 아닌 아카시니깐.
그렇지만 어떨까.
나(僕)는 마유즈미 치히로가 쿠로코를 뛰어넘는 식스맨이 될 수 있다 자부하고 있지만 아카시의 생각은 다르다. 이 사람은 쿠로코를 뛰어넘는 식스맨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나(僕)의 너머에서 마유즈미 치히로를 바라보며 내린 아카시의 결론이었다. 마유즈미 치히로와 쿠로코 테츠야는 비슷한 특성을 지녔을 뿐 다른 선수다. 나(僕)는 그 특성을 살려 패스뿐 아니라 다른 플레이도 가능한 선수로 마유즈미를 훈련시키고 싶은듯 하지만 그래 봤자 평범한 선수가 한계다. 쿠로코와 비슷한 희미한 존재감을 제하면 마유즈미 치히로에게 그 이상의 재능은 없다고 냉정히 단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감을 희미하게 유지해야 하는 그림자로서 그런 플레이는 결국은 독이 될 뿐일 텐데. 나(僕)는 알고 있는 걸까.
라쿠잔은 강하다. 좋은 소재의 고등학교라면 도쿄 내에도 있지만, 굳이 교토에 있는 라쿠잔을 선택한 것 또한 내(僕)의 전략 중 하나라는 것을 아카시는 알고 있다. 개벽의 제왕이라 불리는 라쿠잔에는 한 때 무관의 오장이라 불렸던 선수 중 3명이나 있다. 무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렸지만, 그것이 그들의 실력이 낮다는 것을 뜻하는 건 결코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 라쿠잔에 있는 3명은 라쿠잔에 와 우승을 경험하고 자신감을 되찾은 상태다. 기적의 세대가 아닌 이상 그들에게 대항할 선수는 거의 없을 테지.
내(僕)가 만들려는 라쿠잔이라는 최강의 팀은 얼핏 보면 나(僕)의 의도대로 공략법이 안 보이는 완벽한 팀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건 식스맨이 제 기능을 할 때의 이야기다. 나(僕)의 말대로 눈앞에 있는 마유즈미 치히로가 쿠로코를 뛰어넘는 식스맨이 될 수 있다면 이 이상 승리를 위해 완벽한 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라쿠잔이라는 팀은, 그리고 나(僕)는, 아마.
마유즈미의 얼굴에 아카시는 손을 뻗었다. 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듯 손끝에 닿는 온도는 뜨겁다.
"마유즈미씨, 저도 당신에게는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자신과는 다른 미래를 그리며 아카시는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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